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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난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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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라 Apr 18. 2019

주간일기

2019.4.12~4.19




루시드폴님의 해적방송에 감동해 나도 날적이를 브런치에 쓰기로 했다. 감상보다 있었던 일을 기록하는 것이 목적이다.



2019. 4. 11. 목요일


목요일은 마지막 강의가 있는 날이자 제일 먼 곳으로 수업하러 가는 날이다. 하지만 가는 길이 편하고 멋있는 학생들이 있어서 힘들지 않다.


유재하가요제에 학생 세 명을 내보내려고 작전을 짰다. 무엇이 돼도 좋으니 다들 가난하지 않게 재밌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 길이 될 수 있다면 가리지 않으려 한다.


음악은 도리없이 그 사람을 담아낸다. 아주 얄짤이 없다. 같은 사랑 노래도 아이들 성격마다 접근이 다르다. 가사는 말할 것도 없고 편곡의 방향, 선택하는 노트 하나에도, 열심히 쓴 곡인지 여부와 상관없이 성격이 드러난다. 그 적나라한 현장을 볼 때만 아직도 항상 기가 빨린다. 얘들에게 내 날 것도 다 드러났겠지. 대충 산 인생은 불쑥 찾아오는 살벌한 평가 앞에서 공황이라는 엿으로 돌아온다.


비척비척 서울에 올라와 개인레슨 두 명을 더 했다. 사실 한 명인 줄 알았다가 깜짝 놀랐다. 목요일은 1:1 전공레슨 날인데 하루 레슨이 5명을 넘어가면 목이 타다 못해 오장육부가 뒤집어지는 것 같다. 하루 평균 6~7시간을 쉬지 않고 말하다 보니 하지 않는 실수를 요즘 정말 많이 한다. 이렇게 헐거운짓 하는 건 진짜 스트레스다. 편의점에서 옐로테일 화이트를 사다가 파스타 볶아서 한 병을 순식간에 비웠다. 와인은 취하지만 죄책감은 적은 진짜 좋은 술 같다.


2019. 4. 13 금요일


즐겁고 아픈 금요일이다. 요즘 수면의 질이 떨어지며(아침에 못 일어날 걱정에 계속 깬다) 피곤이 쌓이고 쌓이는 것 같다. 금요일 일은 나의 뇌 기능이 완전 풀가동해야 하는데 영 따르질 않았다.


훌륭한 선생님들과 함께 대안학교를 만들고 있다. 나는 사실 아직도 수저만 겨우 얹어졌을 뿐 유의미한 활동을 못하고 있다. 내 사고 자체가 굳어있는 탓이다. 누구나 자기 일은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남이 무엇에 만족할지 생각하며 무언갈 설계하는 건 재밌지만 힘든 일이다. 그래도 재밌어서 정말 더 잘해보고 싶다. 나만 잘하면 된다.


경건이가 갈비뼈 물리치료를 압구정역으로 받으러와 일 끝나고 만났다. 굳이 가서 만나는 이유는 평양면옥에 가기 위해서고, 압구정에 가면 평양면옥에 가는 것은 당연한 운명 같은 것이다. 갈비 금으로 박은 술 냄새도 맡을 수 없고 난 맛난 냉면과 만두와 함께 소주 한 병을 비웠다. 즐겁다.


이대역 앞에 강아지 옷을 만들어 낮에만 파는 언니가 있다. 아기자기 이쁘고 저렴한데, 가장 훌륭한 점은 레어한 흰멍의 체형(짧은다리, 거대한 몸)에 딱이라는 점이다. 며칠 전 지나갈 때 봐 둔 옷이 있었는데 흰멍의 사이즈가 없어서 주문했고 박이 받아왔다.

새 옷을 입은 흰멍(치마 뒤집어짐)


너무 귀엽다.



2019.4.14. 토요일


토요일은 극으로 힘들다. 마음 같아서는 잠시 일어나 밥 먹고 다시 자고 또 자고 싶다. 수면 부족보다 깨어있고 싶지 않음이 큰 것 같다.


흰멍이랑 벚꽃놀이가 하고 싶었다. 사람 많은 주말은 극혐이지만 극혐보다 중요한 건 예쁜 흰멍이 사진이었다. 못난 부모는 퉁퉁 부은 얼굴로 채비를 하고 나와 경의선 숲길로 구루마를 끌게 했다.


유행하는 하늘샷이 너무 싫은 흰멍이


꽃길만 걷자 아가

저녁엔 홍이 또 다른 친구에게서 받아온 ㅎㅅㄹ 삼겹살을 홍과 함께 언니네 집 가져가서 먹었다. 정말 맛있는 삼겹살을 과거 고깃집 아들이었던 형부가 구우니 기가 맥혔다.  언니네 안 먹는 화이트와인이 산더미라 홍과 두병 반 먹었더니 더욱더 피곤해졌다.


난장판 수저와 젓가락, 어차피 먹을건데 뭐


언니가 고추를 버무리다 깨를 쏟아서 고추무침이 아니라 깨 무침이 됐다. 맛있으면 됐다.


2019. 4. 14. 일요일


단기선교를 가기로 결정했다. 돈도 시간도 없는데 모르겠다 그냥 정했다. 태어나서 해외 한 번도 안 가봤는데 두려움이 엄습한다. 우기의 필리핀 빈민촌. 난 그리 거룩한 믿음도 투철한 희생정신도 없는데. 그냥 중등부 고등부 애들 가는데 교사인 내가 안 가는 게 애들 볼 면목이 없어 결정했다. 어찌되것지.


해산물이 먹고 싶어 경건이와 아현시장에 갔다. 처음에는 바지락에 넣을 대하와 조개를 사러 간 건데 쭈꾸미와 게에 현혹되어 결국 다 사들고 왔다. 그런데 잔뜩 사와서 우리가 고작 해먹은 요리는 쭈꾸미게라면이었다. 쭈꾸미볶음, 꽃게탕 같은 거 할 힘이 없다는 것은 핑계였고 그냥 우리 입맛에는 라면이 짱이다.


아름다워ㅓ~~

2019. 4. 15. 월요일


낮에 피곤해서 커피를 두 잔 이상 마셨더니 악몽을 자꾸 꿔서 어제부터는 피곤해도 커피는 하루 딱 한잔만 마시고 그밖에 카페인 음료는 일절 피하고 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나는 그릇이 정말 작다. 체력도, 머리도, 지식도, 성품도. 학생들에게 충분히 배울 거리를 주지 못하고 있다. 자괴감이 너무 심한 요즘이다. 더 애쓰고 싶어도 체력이 따르질 않는다. 암울하다.


2019. 4. 16. 화요일


세상은 바뀌고 있다지만 때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 같다 화가 난다. 상한 채로 배달 온 음식부터 정부의 정책까지 하나하나 끝까지 붙들고 싸우고 또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피로하다.


그럼에도 싸워야 하는 이유는 그게 현생에서의 삶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것도 안해도 아름다운 순리와 원칙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 천국이겠지. 현생에서는 자기 이익을 위한 악다구니만 존재하고, 그 싸움 안에서 약한 존재부터 희생당할 테니.


차가운 바다에서 마감한 현생의 삶은 너무나 두렵고 슬펐겠지만 천국에서라도 부디 춥지 않고 편안하길..이 땅에 남은 이들의 원한은 이 땅에 있는 이들이 풀테니.



2019. 4. 17. 수요일


수업 끝나고 레슨하고 집에 와서 8시에 잠들었는데 다음날까지 잤다. 흰멍이는 내가 죽은줄 알았는지 아침에 내가 일어나자 헐레벌떡 달려와 반겼다.



2019. 4. 18. 목요일


식도염이 기어코 덮쳤다. 아직 많이 심하진 않은데 죽 종류로 부드럽게 먹지 않았다가는 3일 안에 병원 입원 각이다. 거친 음식 폭식하고 싶다.


학생 때문에 오랜만에 ‘사이키델릭’이라는 단어를 글씨로 써보고, 연달아 주르륵 들으니 너무 좋으나 기가 쪽 빨려버렸다. 생각해보니 나도 한때, 정확히는 중3~20대 초반까지 내가 음악을 한다면 (당연히)사이키델릭을 할 거라고 생각했던게 문득 떠올랐다. 불과 10년 전인데 너무나 전생 같고...지금 생각해보면 왜?? 내가 감히??? 안어울려 ㅋㅋㅋ 이 세 가지가 떠오를텐데 그땐 내가 몽환적인 영혼이라고 생각했고...그냥 개 간지나보였다...뭐 그랬다. 오랜만에 추억이 잠기니 그래도 참 좋다.



멋짐이라는 것이 폭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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