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패드 프로 4세대를 살펴보며 유추하는 애플의 생각
이 글의 내용은 유튜브의 'The Grand Theory of Apple' (https://youtu.be/zO0b-l-u7Yk)이라는 동영상을 참고했습니다.
지난달 애플이 아이패드 프로를 새로 공개했습니다. 2018년 10월에 공개한 3세대 이후로 무려 1년 반을 기다렸음에도, 업그레이드는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픽 성능이 조금 좋아졌고 메모리가 늘어났으며, 초광각 카메라와 라이다 센서가 추가된 게 끝이거든요. 이번 프로는 새로운 디스플레이 생산이 생각보다 늦어져서 나온 구색 맞추기용 모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정말 그것뿐이라면 그냥 신제품을 내놓지 않으면 될 일입니다. 현재 시장에 아이패드 프로를 대항할 수 있는 경쟁 태블릿 PC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성능 면에서도 아직 압도적인 1위니까요. 애플은 무슨 생각으로 이 시점에, 반쪽짜리 업그레이드라는 평을 들으면서 아이패드를 리뉴얼한 것일까요? 애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저는 아이폰 11 시리즈부터 이번 아이패드 프로까지, 애플의 신제품들을 들여다보면 애플의 의도가 무엇인지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아이폰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할게요. 아이폰 11 발표 직후, 저는 애플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내렸어요.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국내 출시 후 실제로 써 보고, 여러 비슷한 디자인의 스마트폰이 나오는 것도 봤습니다. 저 또한 '애플빠'이기 때문에, 애플이 왜 저런 디자인을 했을까 생각했어요. 그리고 반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은, 이 디자인을 마냥 비관적으로만 보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의문은 단순했습니다. 왜 카메라 디자인이 저럴까. 지금까지의 애플이 지켜오던 비례 감각에서는 벗어나 버린 듯한, 그러나 너무나도 정교하게 마감된 카메라 디자인은 저를 혼란스럽게 했어요. 저는 이전에 애플이 자아도취에 빠져 그저 스스로를 자랑하기 위한 디자인을 선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애플은 스스로 패션 회사가 되려고 하며, 아이폰 11이나 맥 프로의 파격적 디자인은 하이패션에서 선보이는 난해한 의복들처럼 스스로의 제품에서 새로운 시각적 충격을 주어 트렌드세터 브랜드이자 디지털 명품으로서의 이미지를 공고히 하려는 의도라고요. 그리고 그 의도에 치중하느라 제품을 실제로 사용하게 될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결핍되어 버린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 의문은 조금 더 복잡합니다. 그럼 그들은 왜 카메라를 세 개나 넣어야 했을까? 카메라를 세 개 넣어야만 한다면, 아이폰 11 프로의 디자인은 최적의 선택 중 하나라는 사실이 일단은 자명해 보였습니다. 애플은 한 장의 유리를 가공하여 만든 카메라 섬에 컷팅을 기점으로 한 유광 마감, 그리고 렌즈를 둘러싼 스테인리스 링을 적용해 주변 사물을 비추는 반사와 내부를 향한 깊이감을 구현했습니다. 이에 적용된 마감은 대량 생산이라 믿기 힘든 수준이죠. 하지만 왜 그런 마감까지 동원해가며 3개의 렌즈를 넣어야 했을까요? 그냥 트렌드라서 그렇다고 하실 수도 있겠죠. 다른 회사들도 다들 카메라를 서너 개씩 넣으니까 경쟁하기 위해 그런 거라고요. 하지만 애플은 굉장히 계산적입니다. 그들은 아무리 시장에서 인기 있다고 해도 절대 홍채 인식 센서나 커브드 OLED, SD카드 슬롯, 혹은 12GB의 메모리를 넣지는 않아요. 그들 스스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전까지는요. 그럼 그런 애플이 왜 카메라를 3개나 넣었을까요?
아이폰 11 프로의 카메라가 작동하는 방식을 보면 그 윤곽이 얼추 잡힙니다. 애플은 세 개의 카메라를 넣었다고 자랑하지 않아요. 대신, 세 개의 카메라가 마치 하나처럼 작동한다고 홍보합니다. 방식은 아주 간단해요. 확대하거나 축소하면, 순간적으로 렌즈가 전환됩니다. 렌즈에 따른 모드가 따로 있거나, 지금 렌즈 바뀐다고 자랑하는 태도가 전혀 없어요. 오히려 반대입니다. 전환 시 각 렌즈 간의 느낌과 색감 차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공을 들였다고 해요. 물론 물리적으로 위치도 다르고 화각이나 조리개 값, 센서 스펙도 다른 카메라 3개인 만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적어도 제가 써본 스마트폰 카메라 중 가장 자연스러운 렌즈 간 전환을 보여줬습니다. 야간 모드도 마찬가집니다. 야간 모드를 켜는 버튼이 따로 존재하지 않아요. 그냥 어두우면 야간 모드가 됩니다. 그리고 알아서 적당한 노출 시간을 잡아줍니다. 딥 퓨전이라는 기능도 똑같습니다. 1초 만에 9장의 사진을 찍은 후 AI 연산으로 이를 합성해 2400만 화소 단일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기능인데, 그냥 딥 퓨전으로 찍기에 적당한 환경이다 싶으면 알아서 켜지고, 딥 퓨전이 필요 없을 만큼 광량이 충분하다 싶으면 꺼집니다. 참 이상하게도, 애플은 어렵게 개발한 훌륭한 기능들을 애써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애플이 꿈꾸는 것은, 기술이 충분히 발전해서 기술처럼 보이지 않는 미래라고 봅니다. 유명한 SF 작가인 아서 C. 클라크는 "충분히 발달한 과학 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애플은 이를 실천하려는 것 같습니다. 애플에게 있어서 기술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통로일 뿐이고, 사람들은 그 통로가 어떻게 지어졌는지는 전혀 몰라도 됩니다. 그냥 원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다면 그만인 것이죠. 애플의 미래에서는 사람들이 카메라 화소나 AI 연산 따위를 몰라도 됩니다. 그냥 찍고 싶을 때, 찍고 싶었던 그대로의 사진이 '마법처럼' 찍히며, 그것을 원하는 대로 편집할 수 있으면 됩니다. 애플 펜슬의 필압 레벨이나 작동 원리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림을 원하는 대로 '마법처럼' 그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래서 애플 제품들의 이름에 'Magic'이라는 단어가 붙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이는 카메라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를 설명합니다. 카메라는 시각적 경험에 관한 제품입니다. 그리고 시각은 인간의 다섯 가지 감각 중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감각이죠. 대뇌 피질의 절반이 시각 인지에 관여하며, 인간의 감각 수용체 중 70%는 눈에 위치합니다. 이렇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사람들이 스마트폰으로 하는 일 중 대부분이 무언가를 '보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카메라는 그 행위를 능동적 경험으로 확장합니다. 단순히 무언가를 보는 것을 넘어, 스스로가 보는 것을 미래에 남기거나 남들과 공유할 수 있도록 기록합니다. 사람들은 아이폰을 통해 일상을 기록하고, 공유하고, 추억합니다. 그렇기에 카메라가 그토록 중요한 것이고, 담을 수 있는 일상의 경계를 엄청나게 늘려주거나(초광각 렌즈), 혹은 인물, 음식과 같은 범위에 초점을 맞추게 해 주는(망원 렌즈) 기능이 필요한 것이죠. 하지만 그 기능은 '초광각 모드'나 '망원 모드'로 작동하는 것이 아닌, 그냥 우리가 눈의 초점을 저 멀리서 바로 앞으로 바꾸듯이, 자연스러운 확대와 축소로 작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아이패드 프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애플은 아이패드에 LiDAR 센서를 넣었죠. 빛이 물체에 닿은 후 반사되어 돌아오는 데에 걸리는 시간을 측정하여, 물체까지의 거리를 입체적으로 알아내는 센서입니다. 복잡하죠? 네, 기술에 관심 없는 일반인들이 자주 쓸 만한 기능은 아니고, 첨단 자율주행차에나 들어가는 센서입니다. 물론 아이패드의 크기와 두께 때문에 실제로 자율주행차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성능이 떨어집니다만, 어쨌든 애플은 이걸 아이패드에 넣었습니다. 대체 왜죠? 그리고 왜 추가로 탑재한 카메라는 망원이 아니라 초광각일까요? 아이폰 11 프로에 망원 카메라로 들어간 52mm 화각 렌즈는 사실 카메라에서는 '표준'으로 불리는 화각에 가깝습니다. 카메라에 입문할 때 보통 50mm 렌즈로 시작하라는 조언을 많이 하고, 실제로 사진을 좋아하는 제 주변인들은 대부분 망원 카메라를 아이폰에서 가장 즐겨 씁니다. 저 또한 아이폰 8을 사용하면서 가장 아쉬운 점이 싱글 카메라라 50mm대 화각의 망원 렌즈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아이패드에 하나 추가된 카메라는 왜 하필 망원이 아니고 초광각일까요?
이건 전부 AR 때문입니다. 애플이 AR을 굉장히 밀어주고 있다는 사실은, 테크 분야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대부분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애플은 실리콘밸리 대기업 치고는 놀라울 만큼 VR에 관심이 없는 반면, AR에는 큰 관심을 보이고 있죠. 최근 2~3년간 애플 발표회장에서 AR 시연이 없었던 적이 드물고, AR이나 MR 관련 스타트업을 계속해서 인수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애플의 행보가 위에서 말씀드린 '기술이 마법처럼 보이는' 세상과 관련되어 있다고 봐요. VR은 사용자를 현실과 차단시켜 버립니다. 애플은 그런 걸 바라지 않아요. AR은 현실 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덧씌우죠. 가상의 가구나 벽지를 AR을 통해 미리 집에 들여보고, 현실 위에 그래픽을 덧씌워서 내 방 안에 모험의 세계가 존재하는 듯 게임을 하고, 폐허에 가까운 문화재 위에 원래 모습을 덧씌워 수백 년 전 웅장했던 모습을 눈 앞에서 감상하고. 마치 '마법과도 같은' 일입니다. 그리고 AR을 잘 구현하기 위해서는 카메라만으로는 부족하죠. 물체와의 정확한 거리를 재서, 3D 스캔을 할 수 있는 LiDAR 센서가 필요합니다.
그럼 초광각 카메라는? 그리고 LiDAR 센서가 그렇게 좋다면 왜 아이폰 11 프로에는 들어가지 않은 걸까요? 첫 번째로는 좁은 화면에서의 AR 경험이 쾌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스마트폰에서 AR 경험을 해 보신 분은 알겠지만, 신기하기는 해도 생각보다 쾌적한 경험은 아닙니다. 눈 앞에 진짜 세상이 펼쳐져 있는데, 그 위에 가상의 컨텐츠를 조금 얹어서 보겠다고 4~6인치 남짓한 화면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건 어찌 보면 좀 우습기도 해요. 그래서 애플은 아이패드에서 우선적으로 AR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10인치가 넘는 화면에서는 경험이 확실히 좀 더 낫거든요. 초광각 카메라도 같은 맥락입니다. 망원 카메라는 사진 촬영에는 좋지만, AR에 쓰기에 적합한 화각은 아니죠. 시야가 좁아지거든요. 사진을 찍을 때는 왜곡이 줄어들고 피사체에 조금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지만, AR 컨텐츠용으로는? 답답함만 커지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래서 초광각 카메라가 필요한 거죠. 세상을 아주 넓게 담아줘서, 그 안에서 AR 컨텐츠를 쾌적하고 편하게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넓은 화각의 카메라가요.
두 번째로는 애플이 아이패드 프로를, 스스로의 새로운 시도를 위한 테스트용 기기로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애플은 아이패드 프로 3세대에서 A12X 칩을 내놨습니다. 기존 AnX 칩에 비해 성능 향상이 비약적으로 크고, 심지어는 아이패드에는 과분하지 않나 싶은 칩이었습니다. 몇 년 안에 애플이 맥북의 칩셋을 인텔에 맡기지 않고 스스로 설계한다는 소문이 많습니다. 그리고 A12X는 그 테스트를 위한 칩셋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마트폰 CPU를 기반으로 맥북에 들어갈 만한 고성능 칩을 바로 설계하기엔 무리가 많지만, 아이패드는 그 시도를 위한 좋은 중간과정이 됩니다. 이번 LiDAR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3D 스캔을 활용하는 앱이 하나둘 등장하면, 애플은 아이폰 12에도 LiDAR 센서를 넣겠죠. 그리고 AR 경험을 확장해줄 무언가를 차차 만들어갈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기에는, 최근 몇 년간 AR에 들인 공이 너무 크거든요.
애플은 많은 것들을 비밀리에 준비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준비한 것들 중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지조차 베일 속에 숨기기 때문에, 우리는 애플이 발표한 소수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통해 그들의 의도를 유추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유추한 바로는, 애플은 마치 마법 같은 일들을 놀라운 기술로 가능케 하는 제품을 만들되,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기술에 대한 이해나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아도 되는 미래를 꿈꾸고 있습니다. 컨텐츠와 그것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사람 사이에 '기기'라는 중간과정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되는 미래 말이죠. 애플은 어쩌면 기기를 컨텐츠와 사람 사이에 놓인 장벽처럼 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토록 미니멀리즘에 집착하여, 가장 원형적이고 단순하며 일체형인 제품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기기 화면 속에서 또 다른 세상을 만나게 해 주는 AR에 집착하는 이유도 거기서 찾을 수 있겠네요. 결국, 미래에 AR은 기기라는 경계 없이 세상과 컨텐츠 그 자체를 직접 사용자에게 전달할 테니까요.
제품의 물리적 형태는 갈수록 사라지고 기기는 컨텐츠를 보여주기 위한 유리창이 되어가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애플은 아직 물리적 제품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산업디자이너의 로망을 실현해 보여줍니다. 한 장의 유리를 가공해 유광과 무광의 경계를 만든 아이폰 11 프로의 후면, 비슷한 가격대의 '진짜 시계' 제조사들에게 한 방 먹이는 애플 워치의 스테인리스 스틸 마감 수준, 컴퓨터 전문가들조차도 당황하게 만든 맥 프로의 발열 설계, 아이패드를 '공중에 띄운다'는 발상의 프리스탑 힌지 매직 키보드 같은 것들 말이죠. 저는 AR보다는 이런 것들에 환호하거든요. 애플이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면서도, 스스로가 계승하고 발전시키고 다듬어왔던 제품디자인이라는 분야에서 노련한 마지막 솜씨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그들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앞으로 그들이 새롭게 만들어낼 것들이 기대되는 만큼이나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