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들려주는 인생 소설
여름 오후, 아스팔트에서 피어오르는 열기가 온 세상을 후끈하게 달궜다. 수진은 두 아이의 손을 잡고 골목길을 걸었다. 여섯 살 민준이는 이미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휘저으며 투정을 부렸고, 네 살 서연이는 목이 마르다며 칭얼거렸다.
"엄마, 더워요. 집에 가요."
"조금만 더 걸어보자. 엄마가 맛있는 거 사줄게."
모퉁이를 돌자 작은 편의점이 나타났다. 수진은 아이들과 함께 들어가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민준이는 메로나를, 서연이는 바밤바를, 수진은 자신을 위해 빙그레 바나나맛 우유를 집었다.
편의점을 나서니 길 건너편에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넓은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세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
나무 아래 앉아 아이스크림을 뜯는데, 마침 바람이 불었다. 후끈했던 공기가 한순간 시원해졌다. 민준이는 "와, 시원해!"라며 팔을 벌려 바람을 맞았고, 서연이는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까르르 웃었다.
그 순간이었다. 수진은 무언가 가슴속에서 따뜻하게 퍼져나가는 걸 느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시원한 바람, 달콤한 아이스크림의 맛. 이것이 바로 행복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예전에는 행복이 뭔가 거창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남편이 승진해서 더 큰 집으로 이사 가는 것, 아이들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는 것, 명품 가방 하나쯤은 가져야 하는 것. 그런 것들이 진짜 행복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무 그늘 아래에서 아이들과 함께 있는 이 평범한 오후가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게 느껴졌다.
12월의 청계천은 차가운 바람이 매서웠다. 지우는 두꺼운 패딩을 입고도 어깨를 움츠렸다. 옆에서 걷던 남자친구 현수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웃었다.
"추워?"
"아니야, 괜찮아."
하지만 지우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현수는 말없이 자신의 패딩 주머니를 열어 지우의 손을 끌어당겼다. 따뜻한 주머니 속에서 현수의 손과 지우의 손이 만났다.
"이제 좀 나아?"
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현수의 체온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차가운 겨울 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었지만, 더 이상 춥지 않았다.
청계천을 따라 걷는 동안, 지우는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것들 - 해외여행, 고급 레스토랑에서의 데이트, 값비싼 선물들 - 그런 것들보다 지금 이 순간이 더 값진 것 같았다.
현수의 따뜻한 손, 함께 걷는 이 길,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느껴지는 온기. 이것이 진짜 사랑이고, 진짜 행복이었다.
"뭐 생각해?"
"그냥... 좋다고 생각하고 있어."
"뭐가?"
"지금 이 순간이."
현수는 지우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계속해서 청계천을 따라 걸었다. 손을 잡은 채로.
토요일 오후, 태희는 거실 소파에 누워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일주일 내내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하느라 지쳐있던 터였다.
"여보, 나 좀 쉬게 해줘. 너무 피곤해."
남편 준호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알겠어. 내가 아이들 데리고 놀이터 갈게. 푹 쉬어."
"정말?"
"응, 걱정하지 마."
준호는 일곱 살 은지와 다섯 살 건우를 불러 모았다.
"자, 놀이터 갈 사람?"
"와! 좋아요!"
아이들은 신이 나서 옷을 입고 신발을 신었다. 준호도 간단히 외출 준비를 마쳤다.
"다녀올게. 한 시간 정도 후에 올 테니까 푹 쉬어."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집안이 조용해졌다. 태희는 깊은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얻었는데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드라마를 보다가도 자꾸 창밖을 내다봤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잘 놀고 있을까? 준호가 잘 돌봐주고 있을까?
한 시간 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다녀왔어요!"
은지와 건우가 뛰어들어왔다. 뺨이 빨갛게 상기된 채로.
"재밌었어?"
"네! 아빠가 그네도 밀어주고, 미끄럼틀도 같이 타주셨어요!"
준호가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며 말했다.
"아이들 완전 신나서 놀았어. 너도 함께 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때 태희는 깨달았다. 혼자만의 시간도 소중하지만,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없는 집은 왠지 모르게 공허했다.
"다음에는 나도 같이 갈게."
"정말?"
"응. 우리 가족이 함께 있을 때가 가장 좋은 것 같아."
준호는 태희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은지와 건우가 각자 엄마 아빠 곁으로 달려와 안겼다.
행복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부자가 되는 것도, 명품을 사는 것도, 큰 집에 사는 것도 아니었다.
행복은 더운 여름날 나무 그늘에서 아이들과 함께 먹는 아이스크림이었다. 차가운 겨울, 연인의 따뜻한 손 안에서 느끼는 온기였다. 남편이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주며 건네는 작은 배려였다.
일상의 평범한 순간들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기쁨들. 그것이 바로 진짜 행복이었다.
그리고 그런 행복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었다. 다만 우리가 너무 먼 곳을 바라보느라 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이제는 안다. 행복은 찾아 헤맬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고, 소소한 일상을 소중히 여기면 된다는 것을.
행복은 바로 여기, 우리가 살아가는 이 평범한 매일매일 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