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를 넘어 무기력을 느낄 때,
그래서 나는 때로, 공포보다 무기력이 더 무섭다.
어떤 장면은 너무 끔찍해서 공포를 느낄 새도 없다.
눈을 피하지도, 울지도 못한 채, 그저 가만히 얼어붙는다.
그건 놀람이 아니라 감정의 정지 상태다.
공포를 넘어선 충격은, 인간을 마비시킨다.
가끔 어떤 영상들을 보면 나는 분노도, 슬픔도, 혐오도 느끼지 못할때가 있다.
오히려 아무 감정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어떻게 저런 일이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만 머리를 맴돌았다.
너무 큰 충격 앞에서는 감정이 작동하지 않는것 같다.
인간의 마음은 폭풍보다 ‘정적’을 먼저 택하기 때문인듯 하다.
이건 도망치기 위한 본능이 아니라, 버티기 위한 본능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정적이 길어질 때다.
공포가 무기력으로 바뀌는 순간, 인간은 ‘참여자’가 아니라 ‘관찰자’가 된다.
보면서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아파하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건 냉정함이 아니라, 심리적 마비다.
너무 큰 비극은 인간의 감정을 초월해버린다.
그리고 그 초월은, 냉혹한 무감각으로 변한다.
우리는 매일 잔혹한 뉴스를 본다.
전쟁, 학대, 자살, 폭력.
처음에는 분노하고, 나중에는 익숙해진다.
그 익숙함이 바로 무기력이다.
무기력은 감정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감정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잠든 상태다.
그 잠은 길게 이어질수록 위험하다.
그 속에서 인간은 현실을 ‘남의 일’로 바꾸는 법을 배운다.
공포는 아직 살아 있다는 신호다.
하지만 무기력은 감정의 사망선언과 같다.
공포는 몸을 움츠리게 하지만, 무기력은 몸을 놓아버린다.
그래서 나는 때로, 공포보다 무기력이 더 무섭다.
공포는 싸우거나 도망치게 하지만, 무기력은 아무것도 하지 않게 만든다.
그 상태에서는 어떤 불의도, 어떤 잔혹함도 “원래 세상이 그렇다”는 말로 정당화된다.
나는 생각한다.
인간의 존엄은 느낄 수 있는 능력에서 온다.
아파할 수 있고, 분노할 수 있고, 울 수 있다는 것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너무 큰 충격 앞에서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면,
그건 세상의 잔혹함보다 더 큰 비극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아직, 무언가에 아파할 수 있는 사람인가?”
그 질문이 멈추는 날, 인간성도 함께 멈출 것이다.
공포를 넘어 무기력을 느낄 때,
그건 세상이 잔인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