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물었다.
“스승님, 사람은 원래 선한가요, 아니면 악한가요?”
스승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오래된 질문이구나. 유학자들은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고 말했고, 어떤 이는 인간이 본래 악하다고 했지.
하지만 반야심경은 그 둘 다를 넘어선다.
그 경은 말한다 — 선도, 악도, 실체가 없다고.”
소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악이 없다는 건가요? 하지만 세상엔 분명 나쁜 일들이 있잖아요.”
스승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악은 있어 보이지만, 본래 실체가 없는 그림자다.
달라이 라마께서는 인간의 모든 파괴적 행동이 **‘자기 집착’과 ‘자기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하셨다.
그 마음의 뿌리는 무지(無明), 곧 ‘세상을 잘못 아는 어둠’이지.
그 어둠이 실제보다 크고 무겁게 보이기에, 사람은 탐욕과 분노, 증오를 만들어낸다.”
소년이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럼 악은 지워야 하는 게 아니라, 잘못 본 건가요?”
스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에드워드 콘즈는 번뇌와 악을 **‘개념의 착각(conceptual fabrication)’**이라 했다.
우리는 그것을 실재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마음의 투영일 뿐이야.
틱낫한 스님도 말씀하셨지. 모든 것은 공(空)하다, 즉 고정된 자아가 없다고.
악 또한 그렇게 ‘비어 있음’을 가진 존재란다.
그래서 악은 우리의 운명이 아니라, 이해를 통해 사라질 수 있는 착각이다.”
소년이 물었다.
“하지만 이해만으로 충분할까요? 나쁜 마음을 그냥 알기만 하면 사라질까요?”
스승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이해는 시작일 뿐이다.
규율과 수행이 함께해야 한다.
달라이 라마께서는 마음의 번뇌를 ‘내부의 적’이라 부르셨다.
그 적을 이기려면 먼저 윤리적 행동으로 자신을 단련해야 하지.
분노에는 자제력, 증오에는 자비, 탐욕에는 나눔으로 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가장 깊은 해탈은 행동만으로 오지 않는다.
공의 지혜가 그 뿌리를 끊어야 한다.”
소년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공을 알면 악을 초월할 수 있나요?”
스승은 부드럽게 웃었다.
“공을 안다는 건, ‘나는 따로 존재한다’는 착각이 무너지는 일이다.
그 순간, 악의 힘은 약해진다.
자아가 작아질수록, 마음은 맑아지고 평화로워지지.
그것이 곧 다시 태어나는 일이다.
달라이 라마는 그것을 ‘내면의 적을 이해함으로써 얻는 자유’라 하셨다.”
소년이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결국 사람은 악해서가 아니라, 잘못 보고 있기 때문에 고통받는 거군요.”
스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반야심경은 악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 실체가 ‘착각의 그림자’임을 보여준다.
악은 무지의 산물이고, 지혜는 그 무지를 녹이는 빛이다.
공의 지혜를 통해 인간은 다시 태어난다 —
그건 악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근원을 이해함으로써 초월하는 것이다.”
소년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럼, 어둠을 몰아내는 게 아니라, 빛을 알아보는 거군요.”
스승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것이 바로 공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