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옷 입고 대본 읽으며 프레젠테이션 하던 행복했던 날들
산업 분석가, 인더스트리 애널리스트로서 내가 하는 일은 담당하는 산업군의 시장 동향을 살피는 일이 핵심 포인트지만, 시장 동향을 살폈으면 그것을 “전달하는” 것 역시 나의 역할에 포함된다. 보도자료나 출간자료 등 서면으로 완성되는 작업들의 경우, 디자인 포맷팅 등 작업 중의 스트레스는 크지만 발행하는 순간에 대한 스트레스는 전혀 없는데, 프레젠테이션이나 워크샵, 세미나의 경우는 반대로 작업 중의 스트레스보다는 오히려 대중 앞에 서서 말로 내용을 전달해야하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너무 큰 스트레스이다.
나는 사실 친구들과 있을 때 자유롭게 얘기하는 것은 매~우 좋아하는 편이지만, 비즈니스적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매우 두려워한다. 보통 외향적인 발표자가 발표를 통해 에너지를 얻는 편이라면 나는 에너지를 영혼까지 끌어서 발표 동안 탈탈 털어내고 발표가 끝나면 바람빠진 풍선처럼 터덜터덜 쓰러지는, 그런 내향성 발표자이다.
그런데 그 발표를 영어로 해야하는 일이 현재의 업무이다. 우리 회사의 리포트를 구독하는 고객사들을 방문하거나 산업 컨퍼런스 무대에서 마켓 브리핑을 하거나 키노트 스피치를 하는 것이 원래의 업무인데, 코로나 시국에 업무를 시작하다보니 2년 동안 고객사나 컨퍼런스를 직접 방문하는 일은 전혀 없었고, 줌이나 팀즈 등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서 발표를 모조리 진행해오고 있었다. 그렇다보니 어느 정도의 뺑끼(...)가 가능했던 것이, PPT 밑 코멘트 박스를 큐카드 형식으로 정리하여 나름 엉망진창이지 않은 발표들로 꾸려갈 수 있었다.
영어 원어민이 아니다보니 가장 어려운 점은, 시장동향을 말하는 나의 표현들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블룸버그나 이코노미스트 등 메이저 경제지를 보면서 공부를 하고는 있지만, 내가 읽어서 뜻이 이해되는 폭은 관대한 반면에, 내가 어떠한 단어를 아예 뇌새김하여서 자유롭게 상황과 뉘앙스에 맞게 꺼내 쓸 수 있기까지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긴장하면 뇌가 하얘지는 입장에서 이미 기존에 아는 표현 외에 새로운 표현을 쓰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도 여전히 나에게는, 수려한 언어가 받쳐주면 그것은 플러스 알파로 좋은 것이고 우선 컨텐츠의 구성이나 흐름, 인사이트와 메세지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성에 차게 완성하는 것에 힘을 쓰고 싶은 것이 현재까지의 마음이다. 좀 더 짬밥이 차서 이 부분이 쉽게쉽게 진행되면 조금 더 다양한 표현을 곁들여 연습을 많이 해서 입에 달라붙게 만드는 것이 중장기적인 목표.
이렇게 방구석 발표자로서의 역할을 열심히 수행하고 있던 지난 2년... 이 망할놈의 코로나 시국에 세상도 적응을 하면서 올해부터는 세상이 조금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5월에 열리는 한 컨퍼런스가 실물로 진행된다는 소식을 전하더니 거기에서 1시간짜리 마켓 브리핑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세상에... 이 이메일을 받고는 사실 기쁘고 반갑다기보다는 눈앞이 하얘지는 느낌을 가장 먼저 받았다. 그 컨퍼런스에서는 큐카드 달달 읽기가 안되니까 정말 프로페셔널 스타일로 1시간을 주절주절 그것도 영어로 떠들어야 하는 것이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에 그래, 2년간 편하게 날로 먹었으면 이제는 진정한 발표자의 길을 걸을 때가 되었다, 하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마냥 구슬픈 목청으로 발표 연습을 하는 나. 이대로 코로나 상황이 나아지거나 위드코로나 라이프 스타일이 지속되면 아마 9월에는 미국에 있는 고객사 출장발표도 하게될 것 같은데, 정말 반가우면서도 두려운 이 양가적인 느낌.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외부적인 강요를 핑계로라도 한 발 더 나아가는, 그런 상황이 된 것이다. 잘 할 수 있을까? 5월에 무대에 올라서 덜덜거리다가 울면서 내려오는 일은 절대 없길!
외노자 소지, 진정한 발표자로 거듭나는 날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