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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유 Aug 08. 2023

'서점비' 수상한 돈의 정체

아버지와 나 그리고 서점에 관한 이야기의 출발점은 아마 '서점비'일 것이다. 우리 가족이 십 년 넘게 '서점비'라고 부르는 수상한 돈의 정체는 다음과 같다. 


바야흐로 내가 초등학생이 된 시점부터 아버지는 우리 남매에게 용돈과 별개로 각각 일주일에 만 원씩 챙겨주셨다. 정해진 요일마다 우리에게 직접 현금을 주시는 게 아니라, 정해진 날마다 아버지가 만 원씩 적립해 놓으셨다. 우리 모르게, 비상금처럼. 이렇게 일주일 마다 차곡차곡 쌓이는 이 돈을 왜 서점비라고 불렀는지는 이 돈을 사용할 때 지켜야하는 규칙과 관련이 있다. 서점비 탄생 이래 최초로 규칙을 정리해보겠다.


첫 번째, 이 돈은 서점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 (서점비라고 불리게 된 이유이다.)

즉, 책을 살 때만 사용할 수 있는 돈이다.


두 번째, 본인이 고른 책이 아버지가 봤을 때 본인에게 유해하다거나 적절하지 않을 땐 제지할 수 있다.

(아버지에게 제지 당하여 약 8년 동안 봉인된 책이 있다.)


세 번째, 만화책은 구매불가능 하다. 단, 'WHY?'책과 같은 교육적인 책은 가능하다.


네 번째, 당일 구매한 책에는 반드시 년.월.일.이름을 적는다.


이 네 가지 정도가 처음 '서점비' 제도를 도입했을 때 정해진 규칙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굉장히 많은 규칙들이 추가되고 수정되며 바뀌었다. 모든 것을 지금 언급하기 보다 아버지와 나 그리고 서점에 관한 이야기를 해나가면서 하나씩 연결시켜야겠다.


쓰면서 또 한 가지 쓸쓸해지는 점은 이런 서점비로 거의 내 평생 모은 책들이 최근 몇 년 간 다 정리되었다는 것이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날짜와 내 이름이 적힌 책. 그런 책들로 이루어진 거실 한 편을 가득 메운 책장. 이젠 없다. 최근들어 텔레비전을 없애고 거실에 책장을 두는 게 유행이라던데, 우리 가족은 시대를 역행하여 22년만에 처음으로 거실의 책장을 없애고 텔레비전을 모시게 됐다. 그 많은 책들이 아쉽긴 하지만, 그런 시절을 보냈기에 지금 내 방 한 켠이 새로운 책들로 가득 차있을 수 있는 거겠지.

내가 초등학생일 때부터 지금 성인이 된 후까지 여전히 서점비를 챙겨주시는 덕분에 나는 책을 정말 사랑하는 인간이 되었다. 말 그대로 '책'을 사랑하는 사람. 나는 언제까지 아버지의 서점비를 받을 수 있을까.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내가 부모님께 서점비를 챙겨드릴 수 있는 능력있는 어른이 될까. 

서점의 마지막 영업날에서 여기까지 왔듯이 아마 마지막 서점비를 받는 날에도 지금 이 날을 떠올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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