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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탄산수라떼 Mar 17. 2020

01화 그렇게 부모가 된다.

돌아보니 부모였다.


돌아 보니 부모였다


2013년 여름,  쌍둥 남매 준이 은이가 태어나던 날, 나는 분만실 밖 계단에 앉아 먼 스마트폰만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뜬금없이 걸려온 보험 권유 전화에 신경이 날카로와졌다. 아내는 자연 분만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제왕절개를 택했고 몇 분 지나지 않아 간호사가 담요에 폭 싸인 핏덩이 둘을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나를 향해 '아버님'이라 불렀다. 어색한 호칭에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나는 쌍둥이 남매 준이 은이를 마주했다. 나는 렇게 무미 건조하게 새로운 변화를 맞이했다.

 

아기를 안는 것부터 분유 타기, 욕시키기, 기저귀 갈기 등 육아의 굴레는 끝이 없었다. 밤새 칭얼거리는 아이 둘을 안은 채 쓴 커피를 들이켜야 했 아기가 기어다니기 시작하면 어디 모서리에 부딪히지는 않을지 항상 마음 조려야 했다. 한 사람이 애를 봐주면 그 때야 비로소 밥 한숟갈을 뜰 수 있고 그마저도 식도를 넘기기 전에 바통 터치를 해야 했다. 애들이 뛰어 다니기 시작하면 길을 잃지는 않을까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맞벌이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 부부는 어린이집에 두 아이를 맡겨야 했고 아침마다 한바탕 전쟁을 해야 했다. 그렇게 초등학교에 들어갈 즈음엔 육아 휴직과 학원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돌아 보니 부모였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반복되는 일상이 여느 부모와 다를 바는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쌍둥이라서 더 힘들지 않냐고 묻지만 어차피 하나 키워본 경험이 없어 무엇이 더 힘든지도 잘 모르겠다. 사실 어느 부모가 쉬운 육아를 하겠는가? 각자 나름의 사연과 고민을 들어보면 세상에 쉽게 태어나 사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다시 부모의 관점으로 돌아가자. 아이가 태어나고 성인이 될때 까지 부모는 자신의 일부를 한웅큼 떼어내야 한다. 어쩌면 절반 이상을 덜어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시간이든 에너지든 말이다.



부모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원론적인 질문 하나 할까 한다. 부모는 왜 필요한가?

부모의 가장 큰 역할은 바로 자녀를 사회에서 가치있는 구성원으로 키워내는 것이다. 신(神)은 도덕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이런 따분하고 소모적인 임무를 부모가 헌신적으로 할 수 있도록 우리의 뇌를 조작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발로 육아의 전쟁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비합리적이다.


부모는 자녀를 온전한 한 명의 성인으로 키우기 위해 무엇을 제공하는가?


1) 보호 - 먹고 자고 입는 환경을 제공한다. 너무 기본적이지만 이 마저도 힘들어 포기하는 사회가 마음 아프기도 하다.


2) 사랑 - 사랑은 아이를 보호하는 동기가 된다. 우리는 아이가 열이라도 나면 애닳는 마음으로 곁을 지키고 내 것을 나누어 주며 즐거움을 느낀다. 아이가 잘 먹고 잘 자는 것만으로 마음이 흐뭇하다.


3) 이해 -  '엄마 아빠가 날 사랑하는 것은 알지만 너무 답답해' 라고 말하는 자녀를 본 적이 있는가? 이해 분명 사랑과 다르다. 부모의 이해는 존중받는 느낌을 주며 자기 확신의 근원이 된다.


4) 교육 - 부모는 자녀에게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 국영수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옳고 그름, 선과 악, 예의, 배려, 존경을 가르쳐야 한다.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는 이 많은 것을 자녀에게 제공 한다. 그리고 이따금 맑은 공짜 웃음으로 보상 받는다. 이 비합리적이고 불공평한 관계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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