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죽지 않았다는 자존심
회사에 다닌 지 15년 차다.
입사 이래로 우리 회사는 늘 풀무원 18.9L짜리 커다란 생수통을 거꾸로 박아서 쓰는 급수기를 사용한다.
18.9L짜리 생수통의 크기를 이야기하자면
웬만큼 건장한 성인 남성의 몸통 상반신 정도의
크기로 보면 되고 그 질량은 약 20Kg 정도 된다.
20kg의 무게를 가늠해 보자면 보통 집에서 먹는 쌀은
10kg짜리 포대로 시켜 먹고 오래오래 먹거나
대가족이면 20kg 쌀을 시킨다.
나는 약 15년 전 입사했던 20대 중반부터
혼자 힘으로 아무렇지 않다는 듯
바닥에 놓여있는 그 18.9L짜리 물병을 두 손으로 들어
급수기에 탁! 하고 꼽는 것을 할 때마다
스스로에 대해 큰 만족을 느끼곤 했다.
별것도 아닌, 그저 부서에서 다 같이 먹는 물통을 갈아 끼우는 행위지만, 회사 내에서 암묵적으로 그 물통은 남자가 가는 것이라는 분위기가 있었고 또 남자도 힘에부쳐하는 경우가 있을 만큼 무거운 일이다는 공감대가 형성해 있었다.
그런데 여자인 내가 별로 힘들이지 않고 해내다니!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훗 하고 어깨가 으쓱했다. 내가 힘이 쎄다! 원초적인 만족감 같았다.
20대 여자로 회사를 다닐 때
내가 큰 물통을 훌쩍 갈아 넣어서 꼴꼴꼴꼴
물 내려가는 소리가 부서에 울려 퍼지면
'아니 왜 이걸 말도 없이 배지가 갈고 그래~'
'이런 건 남자 시켜야지!'
'선배님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제가 해드릴 건데'
이런 친절이 넘치고 스윗함이 판치는 멘트들을
듣는 것도 덤으로 좋았다.
30대 후반 여자로 회사를 다니면서 물통을 갈다 보면
'배지 너 없어서 물 못 먹었어'
'빨리 물통 좀 갈아줘 출근해서
계속 너 오기만 기다렸잖아'
'너가 힘이 세잖아'
이런 다소 다른 뉘앙스의 민원들이 빗발치는데
분명히 나는 여전히 여자고 지들은 남자인데
빨리 와서 물통을 갈아달라는 그 원성 아닌 원성에
' 어이없네? '
하고 받아치지만 왜인지 모르게 또 싫지만은 않은 마음이 묘하게 들곤 한다.
그리고 으쌰-! 하고 또 나는 물통을 간다.
그래 내가 아직도 죽지 않았다고! 하면서 말이다.
어제는 오후쯤 물을 먹으려고 하는데
아오, 또 하필이면 물통에 물이 없다.
아니 18.9L나 되는 물을 대체 누가 이렇게 다 먹지? 싶으면서, 내가 갈려면 갈 수는 있는데 굳이 갈고 싶지는 않은 마음이 어제 따라 들었다.
그래. 나도 오늘은 모른 척 안 갈아본다.
목마른데 좀 참고 퇴근하지 뭐.
나도 요새 왼쪽 어깨 회전근파열이 의심되거든?
나도 이제 몸 좀 사려야 될 것 같거든?
아무도 요청도 묻지도 않았지만 혼자 주거니 받거니 만담을 하며 퇴근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오늘 아침,
어제일은 까맣게 잊고 룰루라라
아침 사무실 루틴인
따뜻한 물을 떠먹으려고
머그컵에 물을 따르려고 하는데
이럴 수가.
내가 무려 열 시쯤 물을 뜨러 갔는데
분명 그사이 사람들이 물이 먹고 싶었을 텐데
아무도 물을 갈지 않고 여전히 물통이 비어있는 것이다.
내가 졌다 졌어.
작은 한숨 내쉬고 또 영차하고 물통을 갈아버렸다.
그리고 소리 없는 외침으로 우리 층 사람들에게 외쳐주었다.
'아, 아, 마이크 테스트
자자 여러분 물통 갈았습니다 예예
이제 원 없이들 오셔서 물 드세요 예예
제가 제 허리 희생해서 잘 갈아 두었습니다
쇤네 힘닿을 때까지 열심히 갈아볼랍니다 예예'
그래.
오늘도 멸치 같은 동료분들을 위해
건장한 내가 힘 좀 쓴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았어! 근육이 쓸만하다고!
내 허세가 오래갈지
팔 근육이 오래갈지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