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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지 Jan 08. 20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 새해에 일출을 보러 정동진에 갔었다. 전년도인 2023년 1월 1일 아침에 선명하게 떠올랐던 동그란 해를 보았던 기억이 너무 좋았어서 2024년 1월 1일에도 첫 일출을 보리라 마음먹고 간 것이다. 성격이 치밀하지 못해서 출발 직전에 교통편과 숙박 예약을 하다 보니, 갈 때 기차표는 겨우 구해서 갈 수 있었지만, 숙소도 인기있는 곳은 모두 마감에, 돌아오는 기차표도 전석 매진이었다.



꽃무늬 숙소


어찌저찌 인터넷에도 안 나오는 1박에 13만원짜리 춘자네 게스트하우스를 전화로 예약하고 도착하자, 엄청난 방 하나가 우리 가족을 기다리고 있었다. 꽃무늬 벽지가 여러 종류로 덧발라져 있고, 누리끼리한 장판에 변기는 핑크색에 물때가 잔뜩 끼어있었다. TV는 서피스 정도 크기에, 그 밑에 하나 있는 작은 냉장고는 아예 찬 기운이 없이 안에 곰팡이가 죽은 흔적만 남아있었다. ‘엄마, 우리 정말 여기서 자야해?” 첫째 아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내 얼굴만 바라본다. ‘제발 아니라고 말해줘!’라는 아들의 표정을 애써 무시하며 어~ 잠만 잠깐 자면 되는데 뭐 딱 적당하게 좋네! 마음에 없는 말만 남편과 주고 받았다. 짐만 두고 회를 먹으려고 나가려는데 키가 안보인다. ‘사장님 키 안 주셨는데요~’ 전화하자 아 키가 이 방이 없어요, 란다. 네? 하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 싸울까? 생각하다가 안돼. 아니야. 정초 전날부터 얼굴 붉힐 수는 없지. 남편을 시켜서 ‘어떻게든 키 마련해달라고 좀 해봐 하하하’ 웃으며 등을 떠밀고 아이들과 내려가자 남편이 또 희한하게 녹슨 키를 하나 받아 들고 온다. 자 어차피 짐 가방에는 잠옷뿐이고! 없어져도 큰일날 일은 별로 없고! 그럼 이제 12월 31일을 장식할 회 먹으러 출발이다!



바다는 회지


전년도에 정동진에 새해 일출을 보러 왔을 때는 아들과 단둘이 밤 늦게 도착해서 맛있는 회를 못 먹었었다. 올해는 남편과 아들 둘 모두 데리고 저녁시간 맞춰오고 맛있는 회집 하나는 미리 남편이 찾아 둔 덕분에 잘 찾아갈 수 있었다. 크아. 쫄깃한 회와 멍게 전복 등 각종 해산물들을 푸짐하게 한상 받아 들자 꽃무늬 벽지로 인한 짜증이 사르르 모두 녹아버린다. 남편은 언제 집에서부터 주머니에 챙겨왔는지 모를 위스키 병을 품에 안고 베시시 웃고 있고 아이들도 작은 소주잔에 사이다들 따라서 캬! 사이다 원샷들을 하고 신이 났다. 물론 나도 숟가락으로 소맥 잔 바닥을 콱 찍으며 소맥의 부드러운 거품 벌써 눈으로 마시고 있었다. 그래 이거면 되었지 뭐. 이 한순간으로 되었다. 이 정도 즐거움이면 이미 이 여행의 목적은 달성되었다.



일출


새벽 7시 40분이 일출 시간이라고 하니 7시 20분부터 모두 기상이다. 최고 연장자 43살부터 최연소자 6살까지 예외는 없다. 네 명 모두 눈꼽도 안 떼고 떡진 머리로 옷만 따뜻하게 입고 히히거리며 서로 입 냄새 풍기며 바닷가로 걸어갔다. 그런데 정말 신기했다. 어젯밤에는 거의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는데 1월 1일 새벽 7시 40분경에는 정동진 해변이 사람으로 꽉 차있다. 갑자기 안도감이 든다. 그래~ 나만 바보같이 해돋이 못볼 것이라는 기상예보를 무시하고 온 것이 아니었어! 나만 바보가 아니라는 안도감이 드는건지 아니면 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올 정도면 해도 양심이 있으면 구름 뚫고 나오겠지 솔직히 이렇게 많은 염원을 꺾는 것은 좀 아니잖아 해가 나오겠네 하는 답 없는 희망에 안도감이 드는건지 어쨌든 우리는 모두 마음이 설렜다. 


해가 나오기로 한 7시 40분! 해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좀 더 기다려 봐야지. 해는 없지만 아들들과 남편과 바다와 핸드폰이 있으니 셀카를 신나게 찍어본다. 사진에 바다는 있고 구름은 있고 해는 없지만 꼬질꼬질한 네 명의 웃고있는 모습이 마음에 든다. 30여분을 기다려도 해는 전혀 보이지 않지만 하늘이 모두 밝아지니 사람들이 대부분 자리를 떠난다. 우리도 가자, 내가 돌아가자고 해도 누구 하나 뭐야 실망하거나 볼멘소리가 없다. 어린이들은 엄마 오뎅 사줘!! 일출을 봤든지 말든지 별로 상관이 없고 오뎅과 오뎅 국물을 양손에 들고 또 히히 신이 났다. 나는 해를 결국 못 본 것이 조금은 아쉽지만, 정동진 역에서 강릉까지 가는 기차 안에서 먹을 반건조 오징어 즉석구이와 마요네즈 간장 청양고추 소스를 같이 주던 그 오징어집을 갈 설렘을 그 아쉬움과 맞바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4년 1월 1일 정동진의 일출은 사실 일기예보 상으로 일출을 보기 어렵다는 걸 출발 전부터 알고 있었다. 오히려 서울에서 일출이 더 잘 보일 것이라는 예보도 보았었다. ‘선우야 정동진에서 일출이 안보일 확률이 더 높다는데?’ 물었을 때 아들이 ‘어~ 괜찮아 그냥 나는 어디론가 꼭 떠나고 싶어’라는 정말 나 같은 대답에 그냥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자, 하고 왔다. 그렇다고 정말 해를 못 볼 줄은 또 몰랐다. 볼 수도 있고 못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고생을 하면서도 올 수 있었다. 분명 여행의 활시위를 당겨준 것은 해돋이였지만 이미 떠나온 이상 여행을 왔다는 그 자체가 즐거움이 되어주었다. 해를 못 볼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와보니, 해돋이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기억이 남았다. 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다녀왔네’ 싶다. 


올해 12월 31일 즈음에 아들들이 또 나에게 ‘엄마 우리 그때 정동진가서 진짜 별로인 숙소에서 하루 잤잖아. 근데 우리 막 비 오는데 불꽃놀이도 했지~ 그때 해돋이도 못 본거 아니야? 그래도 오뎅이 진짜 맛있었지-‘ 이런 소소한 이야기거리를 할 것이다. 그럼 나는 또 우리집 남자 3인에게 물어볼 것 같다. 


올해도,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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