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올의 절망
서울에서 이사 온 하얀 피부를 가진 윤 초시네 증손녀와 수줍음 많은 시골 소년. 좀처럼 마음을 열지 못하던 시골 소년은 소녀의 호기심 어린 “너 저 산 너머에 가 본 일이 있어?”라는 물음에 소녀의 손을 잡고 논길을 달려 산으로 향합니다. 꽃묶음도 만들어 주고, 송아지도 타면서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던 그때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죠. 소년은 수숫단을 덧세워 소녀가 비를 피하도록 해보지만, 그날 비를 맞은 소녀는 앓고 있던 병이 깊어져 소년과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맙니다. 어렸을 적 우리들 가슴을 먹먹하게 했던 국민 연애소설인 황순원의 《소나기》 줄거리지요. 저도 중학교 때 이 소설을 읽고 며칠 동안이나 가슴 한켠이 아련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요즘엔 일기예보도 비교적 잘 맞고 비를 피할 공간도 많아 예전처럼 예상치 못하게 소나기를 맞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저는 가끔 비가 올 때면 어렸을 때처럼 우산 없이 비를 맞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는 그럴 객기도 없고, 주변 시선을 이겨낼 자신감도 없어졌습니다. 특히, 한 올의 머리카락이 소중해지는 나이가 되고 나니 ‘산성비 맞으면 머리 빠진다’는 걱정 때문에 빗속을 달린다는 것은 마음뿐입니다. 대기오염이 심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비를 맞아도 괜찮았지만, 요즘은 산성비라서 맞으면 몸에도 안 좋고 특히 탈모에 치명적이라고 합니다.
탈모에 대한 걱정으로 샴푸를 바꿔보려고 인터넷을 기웃거리던 중 재미있는 글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샴푸 사용 후기였는데 탈모 관리를 위해 약산성 샴푸를 사용해보니 확실히 머리카락이 덜 빠진다는 겁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산성이 탈모에 치명적이기 때문에 산성비를 맞으면 안된다고 했는데 산성 샴푸가 오히려 탈모 관리에 효과적이라고 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산성비와 탈모에 대한 공부를 좀 해보기로 했습니다.
산성비를 알기 위해서는 오래 전에 배웠던 산성, 알칼리성에 대한 기억을 먼저 떠올려야 합니다. 붉은색과 푸른색 리트머스 시험지에 대한 기억도 한번 떠올려 보세요. 저는 지금도 산성과 알칼리성의 리트머스 시험지 색깔 변화가 헷갈립니다.
푸른색 리트머스 시험지를 붉은색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산성이고 pH는 7보다 낮습니다. 산성비는 pH가 7보다 낮은 비를 말하는데, 정확하게는 pH가 5.67 이하인 비를 의미합니다. 산성비 기준이 pH 7이 아니고 5.67인 이유는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가 빗물에 녹아 탄산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오염물질이 전혀 없는 깨끗한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의 pH가 7이 아닌 5.67이기 때문에 이보다 pH가 낮은 비를 산성비로 정한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내리는 비는 정말 산성비일까요? 인터넷을 찾아봤더니 지난 10년간 우리나라에 내린 비의 pH는 4.4~4.9로 산성비가 내리고 있는 것은 맞습니다. 산성비가 내리는 것은 확인되었으니 이제는 이 비를 맞으면 정말 머리카락이 빠지는지를 확인해 보면 되겠네요. 이걸 확인하려고 여러 가지 자료를 찾아봤는데, 아직까지 산성비와 탈모의 의학적인 연관성은 증명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의학적으로는 산성비가 탈모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죠.
하지만, 의학적인 연관성이 증명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탈모 걱정없이 산성비를 맞기에는 왠지 찜찜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주 쓰는 샴푸의 pH에 대한 자료를 좀 더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의학적인 연관성보다는 오히려 이해하기 쉬울 듯 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화장품이나 샴푸는 중성을 띠고 있을 것 같지만 대부분 약산성을 띠고 있더군요. 그 이유는 두피를 포함한 우리의 피부가 pH 4.5~5.5의 약산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피부에 직접 접촉하는 화장품과 샴푸도 그와 비슷한 pH를 갖는다는 겁니다.
샴푸의 pH는 우연의 일치로 우리나라에 내리는 산성비의 pH와 비슷한 수치를 보이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나라에 내리는 산성비의 pH는 우리가 매일 아침 사용하는 샴푸의 pH와 비슷하다는 얘기가 됩니다. 산성비를 맞으면 머리카락이 빠진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매일 샴푸로 머리를 감는 사람은 모두 대머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샴푸에 대한 자료를 좀 더 찾아봤더니 우리가 정설처럼 알고 있던 산성과 탈모의 관계는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알칼리성 샴푸를 사용하면 세정력이 강해 두피가 건조해지고 모발이 가늘어지기 때문에 탈모를 촉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비누로 손과 얼굴을 씻으면 뽀드득거리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 이것은 알칼리성 비누가 강한 세척력으로 피부의 피지막까지 제거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피지막이 제거되면 피부가 건조해지고 외부 자극에 민감해집니다. 탈모를 고민하는 분들 중에 좀 더 개운하고 깨끗한 느낌을 위해 비누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면 사용 후에 상쾌함은 느낄 수 있지만 두피의 피지 성분까지 걷어내기 때문에 두피가 더 민감해질 수 있다고 하네요.
재미있는 사실은 비를 맞으면 머리카락이 빠진다는 속설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오랫동안 정설처럼 받아들여져 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속설은 어디에 기원을 두고 있을까요? 그 기원으로 지목되고 있는 곳은 우산업체와 환경단체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웬만한 비에는 우산을 잘 쓰지 않습니다. 특히 남자들이 우산을 잘 쓰지 않는데요, 이것은 우산을 쓰고 다니면 왠지 약해 보이거나 샌님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물론 폭우가 내리면 우산을 쓰지만 그렇지 않은 비에 우산을 쓰면 유난을 떤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서양에서 우산이 처음 발명되었을 때의 용도도 비를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햇빛을 가리는 양산이었습니다. 우산 umbrella의 어원인 라틴어 ‘umbra’는 그늘이라는 의미이고, 영어사전에서 umbrella를 찾아보면 우산과 양산을 모두 의미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18세기에 우산이 대중화되었지만 지금도 어지간한 비에는 우산을 쓰지 않습니다. 우산을 만드는 업체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우산을 쓰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고, 고민 끝에 비를 맞으면 머리가 빠진다는 식으로 약간의 겁을 주어 우산을 쓰게 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설은 환경운동 차원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입니다. 환경 운동가들이 시민들에게 산성비에 대한 경각심을 주기 위해 산성비를 맞으면 머리가 빠진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산성비는 다른 환경오염과 달리 우리가 쉽게 느끼지 못하고 어떤 피해를 주는지도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았었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자칫 산성비의 피해를 간과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경고를 주기 위해 탈모라는 치명적인(?) 위험성을 제기했다는 것입니다.
알고 봤더니 산성비를 맞으면 머리가 빠진다는 말은 의학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근거가 없는 속설이었네요. 그 속설의 기원이 환경운동이든, 우산 판촉이든 중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 빗속을 마음껏 뛰어다녀도 머리카락이 빠질 염려가 없다는 것이죠. 가끔 일상이 답답해질 때, 그리고 운좋게 소나기가 쏟아진다면 탈모에 대한 걱정없이 빗속을 마음껏 뛰어 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