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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머리 소년 Oct 02. 2020

사람은 인문학, 물은 수문학

비를 다루는 학문은 공학이 아니라 문학이다

장마라는 녀석은 한 번쯤은 그냥 지나쳐도 좋은 듯 싶은데, 지각을 하면서도 빠짐없이 찾아옵니다.

“OO지역에 시간당 OOmm 이상의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져 농경지가 침수되는 등 많은 피해가 잇따랐습니다.” 이맘때가 되면 언론을 통해 자주 듣게 되는 말이지요. ‘기록적’의 사전적 의미는 기록에 남아 있거나 남을 만하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에는 언론 특유의 과장이 좀 섞이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닙니다. 요즘 내리는 비는 정말 기록에 남을 만하게 쏟아집니다. 침수지역은 농경지, 도심을 가리지 않습니다. 몇 년 전에는 서울의 한복판, 그것도 측우기를 만들었던 세종대왕이 지켜보는 종로가 침수되었습니다. 세종대왕이 살아계셨다면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궁금해지네요. 


[ 도시 홍수(출처: 서울타임스) ]

측우기 얘기가 나왔으니 측우기에 대한 문제 하나 풀어볼까요? 측우기를 발명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저를 비롯해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를 다녔던 분들은 대부분 장영실을 정답으로 떠올릴 것 같은데요, 보기 좋게 틀렸습니다. 정답은 세종의 아들인 문종입니다. 

그간 측우기의 발명자에 대해 장영실이라는 의견과 문종이라는 의견이 팽팽했었는데요, 2010년 기상청이 측우기의 발명자는 문종이라고 공식화하면서 논쟁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세종 23년인 1441년에 문종이 만들었고, 그해 5월 19일에 세종대왕이 백성들에게 측우기를 공포했습니다. 우리나라 발명의 날이 5월 19일로 정해진 것도 바로 이날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네요. ‘측우기’는 세계 최초로 비의 양을 측정한 기구로 이탈리아의 카스텔리(Benedetto Castelli)가 1639년에 발명한 우량계보다 무려 200년 가까이나 앞서 있습니다. 


이번에 온 비가 기록적인 강우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비교할 수 있는 기존의 기록이 있어야 하겠지요? 기록을 하는 이유는 현재에 대한 기록도 되지만, 기록을 모으면 자료가 되고, 자료를 축적하면 이것을 토대로 미래에 대한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의 강우기록을 통계적으로 분석해 일 년에 비가 얼마나 오는지, 한 번에 얼마나 많은 비가 오는지, 또 그 비는 얼마나 자주 오는지를 예측하게 됩니다. 이걸 다루는 학문을 수문학(水文學, Hydrology)이라고 합니다. 물을 의미하는 水 뒤에 '공학(工學)'이 아닌 '문학(文學)'이라는 단어를 붙였습니다. 인문학(人文學)이 인간과 관련된 근원적인 문제를 연구하는 학문이니, 수문학(水文學)은 물과 관련된 근원적인 문제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보면 되겠네요. 


공학적인 성격이 짙은 학문 명칭에 공학(工學)이 아닌 문학(文學)을 붙였다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공 계열 전공과목 중 문학이 붙는 유일한 과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도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인간이 공학적 계산으로 풀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논리적 탐구의 영역으로 구분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영문표기에서도 논리적 탐구에 관한 학문명 접미사인 -logy를 붙인 것을 보면 제 추측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수문학 이론으로는 예측과 설명이 안 되는 요즘의 강우패턴을 보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공학적으로 예측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됩니다.


기록적인 폭우로 도시가 침수되고 하천이 범람할 때마다 우리는 피해 복구와 아울러 그 피해 원인을 찾게 됩니다. 관련 시설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한 사람 탓인 인재(人災)인지, 아니면 너무 많은 비를 내린 하늘 탓인 천재(天災)인지를 따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 답은 인재로 결론지어지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내린 비는 잘못이 없고 그걸 관리한 사람에게 잘못이 있다는 것이지요. 

도시가 침수되는 원인은 관련 시설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한 사람 탓도 있지만, 너무 많은 비를 내린 하늘 탓인 경우도 많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말이죠. 우수관이나 하천과 같은 침수와 관련된 시설물은 설계기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수관은 5~10년 빈도의 홍수, 하천은 30~50년 빈도의 홍수에 대비할 수 있도록 설계하는 것이죠. 이 기준을 초과하는 비가 쏟아지면 안타깝게도 침수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최근 쏟아지는 폭우는 설계기준을 훌쩍 뛰어넘는 그야말로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몇 년 전 OO시의 침수사례를 보면, 관련 시설의 설계기준은 시간당 90mm의 수준이었지만, 실제로 내린 비는 이 기준을 훨씬 웃도는 시간당 116mm가 쏟아지면서 발생했습니다. 

2002년 우리가 월드컵 4강의 기쁨에 빠져 있을 때 강원도 동해안을 쓸고 지나간 태풍 '루사'는 하루에 870.5mm의 어마어마한 비를 강릉지역에 쏟아부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일년 동안 내리는 비의 양이 1,300mm 정도니까, 일년 동안 내리는 비의 2/3가 하루에 내린 셈이지요. 


예전에는 상상하기도 힘들었던 이런 비는 게릴라성 폭우라는 이름으로 정말 게릴라처럼 쳐들어와 우리를 놀라게 하곤 합니다. 이러다 보니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통계적인 계산으로 풀기에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30~40년 전에 설치한 빗물관리 시설로 대응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죠. 

저는 홍수 피해의 원인에 대해 사람 탓(人災)만이 아닌 하늘 탓(天災)도 가끔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기록적’ 폭우로 의한 침수피해 원인을 사람 탓으로만 돌리게 되면 시설 확충과 같이 재발방지를 위한 근본적인 대책은 물 건너갈 수밖에 없습니다. 설계기준을 초과하는 너무 많은 비가 내려 기존 시설로는 대응하기에 한계가 있었다는 ‘하늘 탓’도 해야 관련 시설을 확충할 수 있습니다. 


장마철이 시작되면 늘 그렇듯 일부 지역의 침수피해는 불가피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다시 그 원인에 대해 인재인가, 천재인가를 묻게 되겠지요. 하지만,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예측하는 학문이 계산으로 풀어내는 공학(工學)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탐구하는 문학(文學)임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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