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흰머리 소년 Oct 05. 2020

바닷물은 왜 얼지 않을까?

추운 겨울에도 바다가 얼었다는 뉴스는 듣지 못했다. 정말 얼지 않는걸까?


"잘못된 질문"

“당신의 실수는 답을 못 찾은게 아냐. 자꾸 틀린 질문만 하니까 맞는 대답이 나올 리 없잖아.

'왜 이우진은 오대수를 가뒀을까… 가 아니라 왜 풀어 줬을까'란 말이야"


영화 ‘올드보이’에서 오대수를 가둔 이우진이 오대수에게 한 말이다.

이유도 모른 채 15년간 감금된 채 만두만 먹었던 오대수에게 수정된 질문은 영화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간다.


바닷물은 왜 얼지 않을까? 답을 찾기 쉽지 않은 질문이다.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어려운 이유도 질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정확한 질문은 ‘바닷물은 왜 ‘잘’ 얼지 않을까?’이다.

우리는 바닷물은 염분이 높기 때문에 잘 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는 달리 바닷물도 언다. 다만, 민물보다 좀 늦게, 쉽게 얼지 않을 뿐이다.

일반 민물은 0℃에서 얼지만, 바닷물은 염분 때문에 이보다 조금 낮은 영하 2℃에서 언다.


그렇다면 날씨가 영하 2℃ 이하로 내려가는 겨울에는 바닷물도 얼어야 하지만 우리가 주변에서 보는 것처럼 바닷물은 얼지 않는다. 우리나라도 겨울에는 영하 10℃ 이하인 경우가 많지만, 나는 아직 대한민국의 바닷물이 얼었다는 뉴스를 접한 기억이 없다.



"바닷물도 대기처럼 순환하며 섞인다"

바닷물이 잘 얼지 않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염분이 높다는 것과 파도가 있다는 것도 이유가 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닷물이 온도에 따라 위 아래로 순환하기 때문이다.

공기가 더워지면 가벼워져 위로 올라가고, 위에 있던 공기는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오는 대류현상이 물에서도 일어난다.


물이 어는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날씨가 추워지면 수면의 물 온도도 점점 내려간다. 물은 4℃에서 가장 무겁기 때문에 물의 온도가 내려가면 물의 무게도 점점 무거워진다. 물의 온도가 낮아지면서 무거워진 물은 아래 쪽으로 가라 앉게 되고, 아래에 있던 물은 자연스럽게 위로 올라가게 된다.


마치 대기 중의 공기가 순환하듯이 바닷물도 이렇게 대류현상을 통해 순환한다. 이 대류현상이 계속되기 때문에 날씨는 영화 10 ℃ 이하가 되더라도 수면 부근의 온도는 금방 어는점 이하로 낮아지지 못한다. 이 대류현상은 바닷물 전체의 온도가 4 이하가 될 때까지 계속되고, 그 때까지 바닷물은 얼지 못한다.



"한강이 어는데 왜 추운 곳에 있는 소양댐은 얼지 않지?"

물의 이런 대류현상은 바다 뿐만 아니라 큰 호수에서도 일어나기 때문에 추운 겨울에도 호수의 수면 온도는 좀처럼 어는점 이하로 내려가지 못한다.

팔당댐처럼 수심이 얕은 작은 호수는 물 전체가 섞이는 순환이 빠르기 때문에 겨울 동안 수면이 어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수심이 깊은 소양댐은 팔당댐보다 훨씬 추운 곳에 있지만 겨울에 얼지 않는다. 수심이 깊은 호수는 물이 순환하는데 긴 시간이 걸리고, 그러다보면 수면 온도가 어는점에 도달하기 전에 이듬해 봄이 오는 것이다.



"바닷물로 얼린 얼음은 짤까? 밍밍할까?"

다시 바닷물이 어는 얘기로 돌아가 보자. 그렇다면, 바닷물이 얼면 그 얼음은 짤까? 아니면, 밍밍할까?

바닷물은 성분으로 보면 소금이 물에 녹아 있는 것이다.

물은 얼지만 소금은 얼지 않기 때문에 바닷물이 어는 과정에서 소금은 물 밖으로 빠져 나간다. 그래서 얼음은 바닷물처럼 짜지 않다. 물론 민물처럼 소금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식수로 사용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다.

우리가 여름철 집에서 쥬스를 얼려 샤베트를 만들어도 비슷한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샤베트로 만들어진 얼음은 쥬스보다 밍밍하고 얼음 바깥에 있는 과즙은 쥬스보다 훨씬 농도가 진하다.



"우문(愚問)에 현답(賢答)을 고민할 필요는 없다"

잘못된 질문은 잘못된 대답을 유도하고, 잘못된 대답은 잘못된 세상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어떤 일에 실패하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한다.

“나는 도대체 왜 이 모양이지?”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자책으로 끝날 수 밖에 없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헤쳐 나가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질문이다.


남이 던진 우문(愚問)에 현답(賢答)을 고민할 필요가 없듯이 나 스스로도 답이 없는 질문은 던질 필요가 없다. 현명한 대답을 찾고자 한다면 현명한 질문을 고민해야 한다.


작가의 이전글 사람은 인문학, 물은 수문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