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리 교수님, 쫌 천천히 가요. 진도가 넘 빨라요.
완독하는데 꽤 오랜시간이 걸렸다.
물리적인 책의 분량에도 이유가 있지만, 책이 다루고 있는 시간적인 범위와 내용적인 범위가 너무 방대해 내가 가진 지식으로는 따라가기가 어려웠다는 것이 진짜 이유라는 것을 자인할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책은 6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다루고 있는 내용도 3~4만년전의 최초의 인류가 나타난 시점부터 인공지능의 현재까지의 인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목차는 제1부 인지혁명, 제2부 농업혁명, 제3부 인류의 통합, 제4부 과학혁명으로 나누어져 있다. 지구에 최초의 인류가 나타나 지금까지 겪어 온 과정을 시대순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제1부 인지혁명에서는 지구상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종족이었던 호모 사피엔스가 어떻게 지금처럼 지구를 지배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제2부 농업혁명에서는 수렵 채집활동을 하던 인간이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 농업혁명을 통해 생활이 안정되고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이것은 인류가 예상했던 긍정적인 기대와는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제3부 인류의 통합에서는 인류가 침팬지와 달리 수만명, 수억명을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해서는 집단적 상상이 필요했고, 이 집단적 상상이 종교 또는 신화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제4부 과학혁명에서는 산업혁명 등 기술의 발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책 전체 분량의 1/3을 차지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전달되는 느낌은 오히려 적었다. 챕터는 과학혁명이었지만, 내용 중에 많은 부분은 행복을 찾는 방법의 다소 인문학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이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저자의 전공이 인문학 분야로 과학분야가 타 분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부분이었기(물론 이과 출신인 나보다 방대한 과학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호모 사피엔스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로 저자는 호모 사피엔스만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고 그것을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예로, 원숭이를 설득하여 지금 우리에게 바나나 한 개를 준다면 죽은 뒤 원숭이 천국에서 엄청나게 많은 바나나를 갖게 될 거라고 믿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 믿는 이 능력은 집단적 상상이 가능하게 했고, 종교, 건국 신화 등을 집단적으로 상상함으로써 사피엔스는 많은 숫자가 모여 유연하게 협력하는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호모 사피엔스가 가지는 이 상상하는 능력이 사피엔스를 규합하는 원천이었다. 즉, 나약한 존재였던 사피엔스가 지구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도구를 만드는 능력 때문이 아니라 상상을 통해 낯선 사람들과 협력하는 능력 덕분이었다.
인류는 기원전 9500년경부터 정착하여 밀농사를 시작했다. 밀농사를 시작하면서 농업의 생산성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농업혁명이다. 인류는 이 농업혁명을 통해 여유있는 정착생활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식량공급이 늘어나자 인구가 늘기 시작했고, 늘어난 식량은 결국 늘어난 부양가족의 몫이 되었다. 농업혁명을 통해 식량은 늘었지만 인류는 결국 땀에 젖은 빵을 먹어야만 했다. 수렵 채집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찾은 정착생활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농부들에게는 생활이 더 무거운 짐으로 얹혔다. 정착생활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이미 늘어나 버린 가족들로 인해 돌아가기엔 늦어버렸다. 돌아갈 다리가 불타버린 셈이다.
저자는 수렵 채집 생활보다 정착생활로 ‘개선’하면 삶이 나아질 줄 알았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기에 농업혁명을 인류 최대의 사기극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농업혁명이 사기극이 되려면 밀농사가 수렵 채집생활보다 편하다고 인류를 꼬드긴 누군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건 바로 인류 자신이기에 사기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기대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뿐이다. 사기보다는 실패로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듯 하다.
저자의 ‘사기’라는 표현에는 공감할 수 없지만, 농업혁명이 기대와는 다른 결과를 가져와 인류발전에 기여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저자의 주장에는 생각을 같이 한다. 농업혁명과 비슷하게 산업혁명의 경우도 농업혁명의 전철을 밟고 있는 듯하다. 인류는 산업혁명 이후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고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기계를 무수히 발명했다. 하지만, 인간의 기대와는 달리 그 기술들은 인간에게 여유있는 삶을 제공해 주지 못했다.
달 표면에 지워지지 않을 발자국을 남겼던 닐 암스트롱은 3만 년 전 쇼베 동굴에 손자국을 남겼던 이름 모를 수렵채집인보다 더 행복했을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수많은 기술을 개발하고 제도를 개선해 나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여기서 잠시, 뜬금없이 드는 생각
인류는 편리와 행복을 위해 꾸준히 기술을 개발해 왔지만 우리의 행복지수는 크게 높아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인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방법은 없고, 모두가 행복을 느끼는 그런 일 또한 없기 때문이다. 이 논리에 연장선을 그리면 천국은 없다는 추론도 가능하지 않을까?
저자는 종교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스라엘 출신인 저자는 기독교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지만 불교에 대해서는 오히려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특히, 불교에서 말하는 번뇌를 벗어나는 방법에 대해서는 깊은 공감을 나타내고 있고, 나도 책을 읽으면서 많이 공감했던 부분이다.
저자는 불교를 만든 고타마 싯타르타가 깨달음을 얻은 과정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마음은 무엇을 경험하든 대개 집착으로 반응하고 집착은 항상 불만을 낳는다는 것이다. 뭔가 불쾌한 것을 겪으면 그것을 제거하려고 집착하고, 뭔가 즐거운 것을 경험하면 그 즐거움을 지속하고 배가하려고 집착한다. 그러므로 마음은 늘 불만스럽고 평안에 들지 못한다. 우리는 즐거운 일을 경험해도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즐거움이 사라질까 봐 두려워하거나 더 커지기를 희망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찾기를 몇 년씩 꿈꾸지만, 실제로 그 사람을 찾았을 때 만족하는 일은 거의 없다. 상대가 떠날까 봐 전전긍긍하거나 좀 더 나은 사람을 찾았어야 한다고 후회를 한다는 것이다.
고타마는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만일 즐거운 일이나 불쾌한 일을 경험했을 때 마음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거기에는 고통이 없다는 것이다. 당신이 슬픔을 경험하되 그것이 사라지기를 원하는 집착을 품지 않는다면, 당신은 계속 슬픔을 느끼겠지만 그로부터 고통을 당하지는 않는다. 당신이 기쁨을 느끼되 그것이 계속 유지되며 더 커지기를 집착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고 계속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집착이 없는 사람은 고통받지 않는다.
만일 어떤 사람이 모든 집착에서 해방되었다면, 어떤 신도 그를 불행하게 만들지 못한다. 반대로 일단 어떤 사람의 마음에서 집착이 일어나면 우주의 어떤 신도 그를 번뇌에서 구해주지 못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난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행복을 찾거나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 종교를 찾는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집착하는 무엇인가를 얻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종교를 찾고 기도를 하고 나서도 마음의 평정을 찾지 못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대니얼 카너먼은 사람들에게 하루의 일상적인 활동을 재평가하라고 요구해보았다. 상황을 하나하나 떠올려 가며, 그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혹은 싫었는지를 평가하게 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에 대해 갖는 시각에서 역설처럼 보이는 현상을 발견했다.
아이를 양육하는 일을 예로 들면, 즐거운 순간과 지겨운 순간을 평가하게 한 결과 양육은 상대적으로 불쾌한 일에 속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기저귀를 갈고, 설거지를 하고, 아이의 짜증을 달래는 일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부모는 아이가 행복의 주된 원천이라고 말한다.
이것의 이유로 사람들은 행복과 불행의 차이를 분석해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가치있고 의미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데서 온다는 것이다.
내가 이해한 방식으로 다시 설명하자면 이렇다.
행복 요소 - 불행 요소 = (+) 행복하다
행복 요소 - 불행 요소 = (-) 불행하다
위와 같이 행복요소와 불행요소를 따져서 행복하다 또는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퉁쳐서 판단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희로애락의 감정도 우리가 소유하는 물건처럼 ‘나’와 ‘감정’을 이원화할 필요가 있다. 감정과 나를 하나로 생각하면 감정이 나에게 이입되어 ‘나는 화가 났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감정과 나를 분리해 ‘나는 지금 화를 가지고 있다‘로 표현할 필요가 있다.
나와 감정을 일원화하여 하나로 볼 경우 나에게서 감정을 누그러뜨리기가 시간이 많이 걸리고 어렵다. 하지만, 나와 감정을 이원화하여 분리할 경우는 내가 가지고 있던 감정을 버리기만 하면 된다.
내가 이 책을 읽고 나서 가장 많은 울림이 있었던 부분이 바로 마지막 챕터에서 다룬 감정을 다루는 법이었다. 그래서 내 생각을 다시 정리해 보았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나와 분리시키지 못하고 일체로 판단한다. 그러다 보니, 희로애락의 감정이 곧 내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화가 나면 내가 화난 것이니 어떤 방식으로는 그 화를 내가 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희로애락의 감정을 물건처럼 내가 마음 속에 소유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어떨까? 물건처럼 내가 소유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물건인 경우 우리는 명확하게 취사선택을 한다. 갖고 싶은 물건은 취하지만, 갖고 싶지 않는 물건은 남이 아무리 가지라고 줘도 갖지 않는다.
하지만, 감정은 이렇게 명확한 취사선택을 하지 못한다. 남이 주는 대로 받는다.
남이 즐거운 감정을 주면 기분이 좋아지고, 나쁜 감정을 주면 화를 낸다. 감정도 물건처럼 누군가가 원하지 않는 감정을 주면 받지 않으면 된다.
물건과 달리 우리는 누군가가 주는 감정을 그대로 다 받아 들인다. 그리고 그 감정을 손에 받아 들고는 왜 이런 감정을 나한테 주느냐고 화를 낸다. 그 감정을 받지 않고 내려 놓으면 되는데, 그걸 하지 못하고 자신의 품에 안고 자신의 체온으로 녹여서 없애려는 어리석음을 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