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문학동네
책은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저자 김훈이 여러 문학지에 실었던 작품을 모아 출판한 것이다.
배웅, 화장, 항로표지, 뼈, 고향의 그림자, 언니의 폐경, 머나먼 속세, 강산무진. 총 8편은 다양한 등장인물과 내용 전개를 담고 있지만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허무가 아닐까 한다. 작품은 대부분 누군가를 죽음으로 떠나보내고 정리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아내의 죽음을 맞이하고, 어머니의 죽음을 준비하고, 본인의 생을 정리한다. 작가는 작품의 한쪽에서는 죽음을 다루고 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죽음에 대치되는 개념을 병치하고 있다. 화장(化粧)이 그렇고, 매혹이 그렇고, 아이의 분홍빛 목젖이 그렇다. 제 기능을 잃어가는 생식기는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은유이다. 생식기를 묘사하는 표현이 등장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자주, 그리고 지나치게 자세히 언급되는 듯해 살짝 불편했다.
7편을 읽을 때까지는 책 내용이 정리되지 않고 머릿속에서 따로 돌았다. 마치 수업시간에 딴짓만 했던 과목의 시험범위를 한번 쭉 훓었을 때의 느낌이랄까? 그런데 얽히고 설켰던 실타래는 마지막 작품 강산무진을 읽었을 때 씨줄과 날줄로 자리를 잡아갔다.
<강산무진>은 간암 말기 판정을 받은 주인공이 자기의 삶을 정리해 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인공은 한기를 피해 쫓기듯 박물관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조선후기 화가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를 접한다. 8m가 넘는 긴 화폭에는 강산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눈으로 본 강산, 꿈에 본 강산, 꿈에도 보지 못한 강산. 그림 속의 강산은 피어나서 잦아들고, 또 일어서서 끝이 없다. 그림을 본 주인공의 심경을 저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알 수 없는 거기가, 내가 혼자서 가야 할 가없는 세상과 시간의 풍경인 것처럼 보였다.(p.339)’
작품 속에서 죽고, 정리하고, 태어나고, 나락으로 떨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다양한 군상들의 모습은 어쩌면 강산무진도 속의 강산일지도 모를 일이다. 김훈의 이 작품은 문학평론가 신수정의 표현대로 ‘글로 쓴 강산무진도’가 아닐까 싶다. 아니, ‘글로 쓴 인생무진도’가 더 정확한 표현일 수도 있겠다.
이 책에는 세 편의 서평이 담겨 있다. 소설가 신경숙, 소설가 김연수, 그리고 문학평론가 신수정. 세 편의 서평은 모두 김훈의 작품에 대해 칭찬일색이다. 소설가 두 사람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문학평론가마저 낯간지러운 수준의 극찬을 쏟아내고 그 평론이 책의 같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쉽다.
책을 덮으면서 내 머릿속에는 작품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 나의 주변 인물과 겹쳐졌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나는 어떻게 맞이하고 정리할 것인가. 나의 죽음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위암 말기 판정을 받은 주인공이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그린 일본 영화 <엔딩 노트>를 다시 보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