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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 - 죽음에 대해

by 배우 박수연

독립영화를 찍다 보면, 소중하게 다뤄지는 주제들이 있다. 가족, 꿈과 현실, 사랑, 정체성, 우정, 상처, 상상력, 연대 등. 그중에 요즘의 나를 관통하는 주제가 ‘죽음’이다. 작년 여름에 찍었던 <엄마의 파라솔>, <아마개똥인갤럭시>가 그랬고, 올해에 만나게 된 <밝은 방> 작업이 그러하다. 우연하게도 그렇게 되었다.


너무 사랑하는 이의 죽음부터, 내가 슬픔의 주인의식을 가져도 되는가에 대한 죽음까지. 본인의 죽음부터, 타인의 죽음까지.

죽음이란 게 무얼까. 어떤 개념으로 맞닥뜨려야 하는 걸까.





최근 들었던 말 중에서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말은, 죽음 이후 그 물질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공기 중의 원자가 되어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것.

실제 과학적으로 그러하다고 한다. 그 물질을 만질 수 없고 다시 접할 수 없어 슬퍼지는 마음이 크기 때문에, 내 주변에 아직 ‘존재’한다라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또, 엄마의 죽음에 대한 말로, 잠깐 멀리 계신 거고 시간이 많이 지나, 나-중에는 꼭 만날 수 있는 것이라는 것.

평소에도 매일 만나지 않기도 하니까. 그러니 만날 날까지 나도 잘 살다가 만나면 된다. 이 말 역시도 ‘당장’ 사라지지 않는다는 의미라서 위안이 되었었다.





다만, 한 번씩 크게 슬퍼지는 순간들이 있다. 그럴 때 남아있는 사람들은 무얼 할 수 있을까.



작업을 준비하며 나눈 대화 중에서, 누군가가 사라진다는 게 그냥 그 사람만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내 세상도 작아진다는 말이 있었다. 그 사람과 열린 마음을 나누었었는데 이제 그 사람이 없고, 다른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될 때 그 사람들에게 쉽사리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고. 그 사람의 존재감이 없는 것인데, 내 존재감 역시도 줄어든다. 그 말이 되게 슬프면서도 와닿았다. 아무는 데에는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항상 죽음을 가까이 생각하면서 살던 편이었다. YOLO라는 말을 말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 지금을 느끼며 살자고 생각했다. 다만, 막상 앞에 다가올 가족들이나 나의 죽음을 실제라고 상상해 보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꽉 움켜쥐고 살고 있는데, 그 사랑들이 사라진다는 상상을 하면 내 손가락 사이를 스쳐 모래처럼 파스스하고 흩어져버리는 것 같다.​​



여러 종류의 슬픔이 있고, 상실이 있다. 모두 가슴 한편에는 못이 박힌 것과 같은 정 박힌 아픔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살아가는 건 그 아픔에 점점 무뎌지고, 그럼에도 용기를 내서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시간이 필요하다.







이번 장편작업을 하는 과정 중,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어본다. 영화 속 그 순간을 차분하게 맞이하기를. 그 애도의 과정을 진심으로 내가 함께할 수 있기를. 그 공간과 공기를 꼭꼭 씹고 느끼기를.


홀로 마주한 용기의 순간을, 내가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표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럴 것이다.





<재능을 돈으로 바꿀 수 있을까> 엄주



Edvard Munch (1863-1944 Norwegian) • Towards the Forest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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