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비전문가의 '발도르프 미술교육' 따라해보기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발도르프 교육을 받아본 적도, 지도 방법론에 대해 훈련을 한 적도 없다. 한국에 있을 때에도 유행을 따라 발도르프 유치원에 보내거나 숲 유치원에 보내지 않았다. 그렇게 따지면 나는 발도르프에서 단 한 글자도 알고 있지 않다.
다만, 개인적으로 '진정한 배움이 무엇인가?', '효과적인 교육 방법은 어떤 것일까?' 따위의 주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왔다. 한국에서 8년간 청소년 단체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경험주의 교육'에 대해 흥미를 가진 것도 그 때문이다. 그 시기, 어린이들의 배움은 지식 전달이 아닌 감성과 예술이 더 큰 역할을 할 것이라 여겼고, 발도르프 교육의 주제와 방법론은 나름대로 매력적이었다. 사실 처음 독일 유학을 고민할 때에는 발도르프 교육이 시작된 슈투트가르트(Stuttgart)를 유학지로 고려하기도 했다.
어쨌든 지금은 마르부르크 근교에 살고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슈투트가르트에 살지 않으면 발도르프 교육 못하나? 그럼 한국에서는 어떻게 해. 여기서도 한 번 해볼 수 있지!'
독일 유치원은 (물론 가정의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아침 일찍 등원하여 점심 어간에 하원 한다. 그러니까 독일 부모에게는 하루가 길어지는 효과가 있다. 아침 일찍부터 부단하게 움직여야 하고, 오후에도 자녀와 함께 보내는 물리적인 시간이 만만치 않다.
우리 집 세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8~9시에 등원해서 12시면 집으로 온다. 아내와 나는 이 시간을 잘 활용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보통은 숲으로 산책을 가거나 옆집 할아버지 댁을 방문한다. 사실 아이들이 세 명이나 되면 자기들끼리 알아서 잘 놀기도 한다. 그래도 조금은 더 특별한 시간이 필요하지 싶었다. 우리 아이들이 공작이나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데, 여러 발도르프 자료들을 개인적으로 찾고 공부하며 아이들의 활동시간에 적용해보기로 했다. 말 그대로 흉내내기다!
청소년과 놀이문화 연구소 전국재 소장님은 이런 말을 하셨다.
"전문가는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진짜 전문가는 자기 현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우리는 회원 아이들이 세 명이나 있는 진짜 전문가가 아닌가?
부모가 유학을 왔다고 해서 아이들의 삶이 희생되어선 안된다고 한국에서부터 생각해 왔다. 그래서 최대한 아이들이 있는 시간에는 아내와 돌아가며 자녀와 유의미한 시간을 보내고, 우리들은 밤이나 새벽 시간을 더 활용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어쨌든 그런 마음으로 이 기록을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발도르프'는 아니지만, '발도르프' 같은, 결국 '발도르프'는 아닌 흉내내기 형식의 다분히 '개인적인' 우리 아이들 기록이다.
첫째 지온(만 6세), 둘째 하온(만 4세), 막내 시훈(만 2세).
발도르프 미술 교육의 이론에 따르면, 만 0~3세 아동의 그림 특징은 아래와 같다.
▶ 주로 원형태를 발전시키는 형식으로 그림을 전개한다. (예: 지문, 회오리 모양 등)
▶ 의식해서 그리는 그림이라기보다, 무의식에 바탕을 둔 그림이다.
▶ 동작이나 움직임을 표현하며, 공간에 표현된 것들을 스스로 내면화한다.
▶ 그러나, 그림이나 미술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우연한 만남'이라 할 만큼 작업의 집중시간이 짧다.
▶ 한 가지 주의할 것은 가능한 대로 '검은색' 도구를 주지 않는 것이다.
검은색은 모든 색을 끌어들이고, 윤곽을 형성하게 하여 아이의 의식이 확장되는 것을 막는다.
위의 사진은 2월 3일 삼 남매의 미술놀이 장면이다.
아니나 다를까 막내는 삼 남매 중 가장 산만한 편이었다. 하지만 짧게나마 자신의 작업에 몰두하고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무의미한 선의 동작인 것 같지만, 자신의 작품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표현하기도 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위의 사진에 보이는 오른편 인형이다. 막내는 그림을 그리다가 주변에 유니콘 인형이 보이자 자신의 그림으로 집어갔다. 이후에는 점점 많은 유니콘 인형을 모아다가 종이 위에 놓아가며 작품의 일부로 삼는 모습을 보였다.
발도르프 이론에 따르면, 어떤 동작이나 움직임을 내면화한다고 하였다. 이 경우는 자신이 형성한 작품 속의 에너지뿐 아니라 외부의 사물까지 쉽게 내면화하는 모습이라 보인다. 달리 말하면 작품의 개념이 유연하고, 대상에 대한 구분이 모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나의 내면이나 에너지를 종이 위의 선으로 표출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외부의 대상이나 에너지 역시 자신의 내면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함을 가진 것이다. 발도르프에서 검은색의 도구를 잘 주지 않는 까닭이 윤곽(구분)이 명확해져 확장성을 방해한다고 했는데, 어느 정도는 수긍이 되었다.
다음은 막내의 최근 작품들이다. 0~3세 그림에서 보이는 여러 가지 특징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다음은 둘째 하온이다. 만 3~4세 아동의 그림 특징은 아래와 같다.
▶ 원을 닫아, 공간을 구분하기 시작한다.
▶ 스스로 닫은 원 안에 점을 찍거나 표식을 넣기 시작한다.
이는 원 안에 있는 중심점을 표현한 것으로 자아개념이 정립되는 시기에 있다는 뜻이다.
▶ 수직선과 수평선으로 십자무늬를 그린다. 이는 원과 원, 선과 선이 결합되는 것을 뜻한다. 아이가 가지고 있는 존재와 인식들이 다양한 형식으로 만나고 있음(결합)이 그림에서도 표현된다.
▶ 모서리 부분을 인지하여 사각형의 형태도 그림에서 드러난다.
▶ 이 시기부터는 자아의 개념이 형성되고, 타 존재와 구분, 분리가 이루어진다. 이로 인한 반항기도 드러난다. 비로소 '교육'이 가능해지는 시기라 할 수 있다.
온전히 자기 작품에만 관심을 가지는 막내와 달리 둘째(위 사진 맨 왼쪽)는 언니의 작품에 영향을 받는 것을 알 수 있다. 함께 그림을 그리면 언니가 어떻게 그림을 완성하는지 자주 흘끔 눈을 흘기곤 한다. 따로 그림을 그릴 때는 독특한 개성이 드러나는 작품이 많은데, 함께 그리면 내용이나 분위기가 언니의 것과 비슷해지는 것을 자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도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된다. 자아개념이 형성되면서 더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자 하는 둘째의 욕구가 드러나는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함께 그림을 그릴 때 이런 둘째를 채근하지 않고, 둘째가 그린 그림에 '크게 관심을 보이며' 그림의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 물어보며 격려하자 세 번째 작품은 언니의 그림을 흉내 내지 않고 자기만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발도르프 이론에 따르면 6세 이후부터 자신의 그림을 구성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내 생각에 둘째는 언니의 영향으로 일면 자기 연령대보다는 다소 빠르게 진행된 것 같다.
아래는 최근 둘째가 그린 작품들이다.
개인적으로 둘째가 더 어렸을 때, 한국에서 그린 예전 작품들이 참 재미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에는 미처 생각을 하지 못해 기록으로 남겨두지 못하고 모두 없어져버려 못내 아쉽다.
어쨌든 최근 둘째의 작품을 보면 어느 정도 나름의 이야기들이 만들어지고 있음이 보인다. 3~4세 그림에서 주로 보이는 구획과 구획 내 존재의 모습이 드러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둘째의 작품은 일반적으로 4세 이후 아동이 보이는 특징들이 더 강하게 보인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아마 언니의 영향으로 인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잘못된 것이라 보지 않고, 조급한 마음도 없다. 여러 영향을 주고받으며 오늘 둘째의 모습이 있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단색 그림이지만 이 그림의 느낌을 매우 좋아한다. 둘째는 한 번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면 한 시간 정도는 거뜬히 외부에 신경을 차단하고 집중하곤 한다. 위 그림을 보면 각 대상들이 꼼꼼하게 묘사되고 표현되었음을 볼 수 있다. 사람에 대한 표현은 언니의 표현방법과 비슷하다. 다만 각 대상이 입고 있는 드레스의 표현이 보다 세밀하다. 둘째는 여느 여아들과 마찬가지로 공주와 드레스를 좋아한다. 자신이 입고 싶은 다양한 드레스를 단색의 사인펜으로 세심하게 그렸다.
사진 속의 등장한 날짜에 그린 작품이다. 언니의 그림을 한껏 흉내 내다가 비로소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자 그림에 이야기 살을 붙여가며 그림을 그렸다. 보라색 물에서 수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 했다. 물 위를 거의 걸을 듯한 세 명의 동생들과 달리 오른쪽 남색 수영복을 입고 있는 언니는 수영을 하지 않아도 바닥에 발이 닿는다고 말했다. 언니의 존재감이 둘째에겐 가장 강하기에 다른 대상보다 더 크게 표현된 것 같다.
마지막으로 첫째 지온이다. 만 5~7세 아동의 그림 특징은 아래와 같다.
▶ 6~7세부터는 자기 스스로 그림을 구상하고, 표현하기 시작한다.
▶ 삼각형이 그림에 표현되기 시작한다. 이는 집을 그릴 때 주로 응용된다.
▶ 어떤 대상이 직립되는 모양이 드러난다. 직립은 의지력을 의미한다. 아동의 의지가 점차 강해짐이 그림에도 표현된다.
발도르프 교육이론에 따르면 전 세계 아동의 그림이 비슷한 형식으로 발달하는 것은 '에테르의 몸'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영적, 또는 에너지의 흐름과 관련된 개념인 듯하다. 어떤 이가 발도르프 교육은 다분히 영적인 교육법이라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싶다. 나는 기독교인으로 이런 발도르프의 영적인 개념에 현재로서 큰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에 대해 더 알아보고 연구해보며 다듬어 가야 할 부분이라 생각된다.
다음은 지온이의 그림들이다.
아이의 그림에 현재의 경험이 투영되고 재구성됨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얼마 전 아내의 외할아버지께서 작고하시고 아내가 힘들어하자 아내를 위해 그림을 그려 위로한 작품이다. 아내의 할아버지가 이 땅에서 하나님 곁으로, 하늘로 올라가시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아내는 이 그림을 보고 한참을 울었다. 첫째는 이미 훌륭한 스토리텔러가 되어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