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미 오래전에 끝난 여행기다. 기억의 왜곡이 있을 터이다. 시간이 꽤 지나고 지난날을 돌아보면 어려웠던 일도 추억으로 미화되곤 하니까. 그렇지만 또한 얼마간 소화가 된 경험들을 기록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터이다. 그런 핑계로 지난 추억들을 다시 끄집어 내 본다.
라우터브루넨 (Lauterbrunnen)
스위스 여행의 베이스캠프로 우리는 이곳을 낙점했다.
그래도 몇 년간 독일에서 살았다고 지역의 이름이 독일어인 것이 내심 반가웠다.
라우터브루넨(Laut:er:Brunnen). 뜻을 풀이하면 소리가 크고, 시끄럽다는 뜻의 'Laut'과 솟아나는 샘, 또는 샘물이라는 뜻의 '(der) Brunnen'가 합쳐진 합성어다. "소리가 큰 샘" 또는 "큰 소리가 나는 우물"(이 있는 마을) 정도의 뜻으로 직역할 수 있겠다. 마을 주변에는 크고 작은 폭포가 무려 72개가 있다고 하는데, 그 폭포들이 서로 요동치고 포효하는 소리를 들은 옛 스위스 사람들은 그것을 꽤 인상적으로 여겼던 모양이다.
참, 이곳은 또 <반지의 제왕>의 작가 J.R.R. 톨킨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최후의 보루이자 엘프들의 도시인 '리븐델(Rivendell)'이 이곳을 배경으로 했다. 1911년 라우터브루넨을 방문한 톨킨은 이곳의 계곡과 풍광에 깊이 매료되었던 듯싶다.
영화와 소설의 삽화에 등장하는 리븐델의 높은 절벽과 폭포의 모습을 보면 신비롭기 그지없다.
'우리도 톨킨이 느꼈던 감동을 비슷하게 받을 수 있을까'
여행은 계획을 할 때부터 이미 시작된다. 저마다의 상상과 기대감이 섞여 들어 일상과 다른 이질간과 묘한 흥분을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이다.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엘프들의 도시 리븐델(Rivendell)을 묘사한 삽화 (*출처: https://wallpapercave.com/rivendell-wallpapers)
독일 집에서 이른 아침부터 일찌감치 출발했다. 새벽부터 어수선한 준비가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니, 어머님. 그것도 챙겨가시게요?
장모님께서는 독일에 도착한 뒤부터 스위스로 떠나기 전날 밤까지 8명의 식구들을 먹일 밑반찬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으셨다. 그런데 이제는 집에서 쓰는 10인용 전기밥솥까지 정리하여 여행 짐에 챙겨 넣고 계셨다.
"없으면 없는 대로 지내도 괜찮아요.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입으로는 짐짓 어머님을 말렸지만, 이미 스위스의 미친 물가에 대해 여러 사람들의 입을 통해 익히 들은 터라 어머님의 수고하심과 마음씀이 되려 감사했다.
그렇게 부산을 떨며 새벽부터 출발했지만, 스위스에 도착한 것은 늦은 저녁이 되어서였다. 여행 길목마다 보이는 유명한 도시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기에, 프랑스의 작은 마을 몇 곳을 찍으며 빙글 돌아서 내려갔다.
사실 나는 처음에는 겨울에 알프스 자락으로 차를 타고 여행하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었다. 몇 년 전 겨울, 울창한 전나무 숲이 유명한 독일 남부의 '검은 숲(슈바츠발트, Schwarzwald)'을 여행할 때 가파르고 좁은 도로에 흠칫 놀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그런 염려와 달리 스위스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안정적이었다. 이따금 스마트워치를 볼 때면 점차 높아지는 해발고도를 수치로 보았지만, 완만하게 오르는 잘 정비된 스위스의 좁은 도로는 생각보다 더 편안했다. 이미 스위스의 국경에 도달했을 때에는 주변이 어두워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리 위험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방심은 금물이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갈 때 즈음부터 길이 굽어지기 시작했다. 좁은 스위스의 도로를, 게다가 이미 어두워져 아무것도 뵈지 않는 중에 비틀비틀 굴곡을 따라 달리니 실제 계기판의 숫자보다 더 빠른 속도감이 느껴졌다. 라우터브루넨은 샘과 폭포로 유명하지만, 또한 협곡으로 유명하다는 사실이 그제야 퍼뜩 떠올랐다. 협곡이라. 그것은 가파른 절벽에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다. 바로 그때였다.
"우와! 저것 좀 봐!"
자동차의 전조등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도로 위에, 하얀 조명을 받은 거대한 절벽이 우리의 눈으로 쏟아졌다.
늦게 도착한 라우터브루넨(Lauterbrunnen). 숙소의 창문으로 바라본 폭포의 모습
처음으로 본 스위스의 풍경.
거대한 암석이 덮칠 듯 우리에게 몰아치며 환영의 포옹을 하려는 듯했다. 그것은 따뜻한 환영이었는지, 혹은 짐짓 자신의 위엄을 자랑하는 고고한 몸짓이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나는 솔직히 그 포옹을 피하고 싶었다. 그 정도로 거대한 위압감을 느꼈다.
나는 완전히 압도당했다.
거대한 자연 앞에 인간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가?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고 있다고 자부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 완전히 자연에 압도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라곤 '우와, 우와' 하는 탄성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숙소에 도착한 뒤에도 나는 부엌의 창문을 통해 보이는 절벽과 끊어지지 않는 폭포수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것과 시선을 마주할 때 나는 몸이 붕 떠 그 곳에서 떨어진 존재처럼 느껴졌다. 나는 분명히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마치 그곳에 없는 것 같았다. 섞여들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믿기지 않는(Surreal) 거대한 존재와의 조우. 그것이 스위스와 첫 만남에서 내가 받은 첫인상이었다.
그래.
그것은.
나를.
완전히 압도했다.
숙소 발코니에서 바라본 라우터브루넨(Lauterbrunnen)의 협곡. 놀라서 손이 떨렸던 것일까? 이제 보니 밤에 찍은 사진들은 모두 초점에 벗어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