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에서 어머니로, 어머니에서 다시 나에게로 3대가 이어졌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에 대해 배우고 들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나는 하나님에 대해, 기독교 교리에 큰 의심을 하지 않았습니다. 알려주는 대로 배웠고, 배우는 대로 믿으며 그 신앙 속에서 자랐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실까?
머리가 굵어진다는 말은 어쩌면 스스로 의심이 많아진다는 말일겝니다. 자기만의 생각을 통해, 자신의 세계가 만들어진다는 것이겠지요? 내가 배운 하나님이 분명히 성경에는 살아계시는데, 왜 내 삶에는 그렇지 않을까 많이 고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실까? 아니 살아계셨으면 좋겠다. 그리 생각했더랬습니다. 그런 고민과 바람은 딱히 이렇다 할 결과 없이 고등학교 3학년까지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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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이 있었습니다.
하필이면 어느 분이 잘못된 자리에서 인용하시는 바람에 그 내용마저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렸지만, "무언가를 온 맘을 다해 원한다면, 반드시 그렇게(파울로 코넬료, <연금술사>의 내용 중)" 되긴 하더이다.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진학을 준비하던 고삼. 그 고생의 극에서 나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도움을 구했고, 기적을 바랐습니다.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그런 일이 일어나면,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겠다고 보이지 않는 약속 했습니다. 하나님을 증명하는 실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증명했고, 환희에 차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기적은 이내 연기처럼 사라집니다.
그리고 기적이 떠난 자리에는 불평과 허무만이 남았습니다. 아니 불평과 허무가 다가와 기적을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적이 떠난 자리에는 증오가 남더이다. 감사는 쉬이 사라졌습니다. 평생 갈 것 같던 하나님의 존재를 마주하는 기쁨도 아스라이 먼 과거처럼 그리 사라졌습니다. 나는 마치 기적을 경험하지 않았던 때의 그 사람으로 돌아가있었습니다. 어쩌면 더 망가졌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기적의 경험 전에는 기적을 바라는 순수한 마음이라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젠 이 정도 기적쯤을 그거 냉소하고 넘길 만큼 마음이 딱딱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기적은 계속 찾아옵니다.
인생에 한 번뿐인 기회란 없는 모양입니다. 이기적이라 그렇겠지요. 그렇게 하나님을 잊고 살다가도 급한 일이 생기면 다시 하나님을 찾습니다. 모태 신앙자는, 아니 나란 인간은 그런 면에서 뻔뻔하고 약았습니다. 차라리 무신론자로 평생을 산 분들은 자기 지조라도 있었겠네요.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지 못하고, 다시 비굴하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여러 기적들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기적의 내용을 말씀드리지는 않으려 합니다. 내용은 실은 무의미하거든요. 크게 구분하면 굵직한 위치의 변동이 있던 때에 특히 그런 기적들이 있었지요. 차원의 이동? 아니 변태라고 해둘까요? 고등학교에서 대학으로 갈 때처럼, 한국에서 독일로 올 때. 나는 분명히 하나님의 존재를 느꼈습니다. 다른 말로는 별로 설명할 수 없었으니까요.
기적은 하나님을 인정하게 하지 못합니다.
첫 번째 기적이 주는 환희가 그리 허무하게 사라졌던 것처럼, 두 번째 기적도, 세 번째의 기적도. 아무리 크고 경이로운 기적이라 하더라고 그것이 주는 믿음의 단단함이란 무르기 그지없습니다. 얼마가 지났을까? 몇 달일지, 몇 년일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다시 비슷한 허무함 속에서 허덕이고 있더군요.
영화 <이집트 왕자>에 등장하는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
천지가 개벽하면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까요?
기적이 크다, 작다 따질 수는 없겠지요.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기준일 뿐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런 기준이 있다고 생각해 볼까요? 비교적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이 어쩔 수 없는 기적을 큰 기적이라고 정의한다면요. 그 정도의 기적이 있으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나요?
아니요. 그럴 수 없을 거예요. 이집트에서 10가지 믿을 수 없는 기적을 경험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결국 어떻게 했지요? 홍해가 갈라지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았던 그 사람들이 어떻게 했나요? 천지가 개벽하는 기적을 경험한 그들의 끝이 어땠지요?
사소한 현실이 경이로운 기적보다 어제나 더 무겁습니다.
물론 이것은 성경의 신화를 믿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논의 밖의 질문입니다. 성경의 내용 그 자체에 대한 부분만 보자는 것이에요. 성경에 있는 그 기적 같은 신화들이 참이라고 가정해 봐요. 그리고 그 기적을 그대로 경험했던 그들의 행동도 역시 참이라고 해봅시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떠났지요? 그들은 먹을 물이 없었기 때문에 떠났답니다. 마늘과 부추, 고기를 먹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났지요. 거대한 기적이 가져다주는 믿음이란 언제나 눈앞의 사소한 일상보다 연약하답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증명할 수 있지요?
하나님은 아마 증명할 수 없을 거예요. 내 평생을 포함하여 인간사 모든 시간을 합치더라도 아마도 증명할 수 없을 거예요. 인간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기적을 조차도 오늘의 사소한 고민 앞에서 연약하게 바스라져 버리니까요. 그것은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내일도 그렇겠지요.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존재할 수 없는 기적일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연약한 믿음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사람이 자신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그 자체가 천지가 개벽하는 것보다 더 한 기적인 듯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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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증명하기를 포기했습니다.
그냥 믿어볼까 해요. 아마도 난 계속 넘어지겠죠. 계속 혼란스러워할 수도 있겠네요. 어쩌면 평생 그렇게 답답해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요, 그러면서도 그냥 믿어보려고요. 아마 그게 끊이지 않는 기적을 경험하는 일일 것 같아서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