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교육, 봄을 준비하며 심은 양파 꽃 이야기
본격적으로 겨울이 오기 전, 그러니까 한 10월 말 정도 되었을까?
한스 귄터 아저씨 부부가 정원의 화단에 거름을 뿌리고 흙을 돋우고 있었다. 겨우내 잔디나 화초가 죽지 않도록 따뜻하게 덮어주는 것이라 했다. 아이들이 심심해하면 같이 와서 일을 거들어도 좋다고 했다. 막내가 아저씨가 들고 있는 삽에 계속 관심을 보이자 얼른 창고로 가서 조그만 삽을 하나 챙겨 와 막내에게 선물로 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긴 작대기가 생기면 언제나 전투본능이 자극되는 법. 막내는 기대했던 농사꾼이 아니라 병사가 되어 삽을 위협적으로 휘두르거나 온 화단과 집을 쑤시고 다니기 시작했다. 후회는 언제 해도 늦은 법임을 다시 한번 실감케 되는 순간이었다.
한스 귄터 아저씨와 이블린 아주머니는 그래도 쫄랑쫄랑 따라다니는 세 꼬맹이들이 귀여우신지, 손수레에 몽땅 태우고는 운전기사 노릇까지 해주셨다. 아이들은 자신이 누구에게 어떤 사랑을 받는지 본능적으로 아는 법이다. 그것이 비록 나와 다른 국적의 사람이고, 언어조차 통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말이다. 워낙 수줍음이 많은 세 녀석들이지만 그때부터 줄곧 두 사람만 보이면 "할아버지(Opa 오파), 할머니(Oma 오마)."라고 외치면서 반가워했다.
한국이든 독일이든 어른들의 부지런함은 알아줘야 한다. 집 둘레둘레 버려지는 공간이 없도록 화단을 가꾸어 놓았다. 도톰하게 퇴비 섞은 검은흙들을 화단에 가득 채우고 난 뒤 이블린 아주머니는 곳곳에 양파를 심기 시작했다.
'꽃이라도 심을 줄 알았더니 양파를 심구나. 독일 사람들도 텃밭 가꾸기를 좋아하는 모양이지?'
그러고는 그때 일을 곧 잊어버리고 있었다. 이때의 기억을 다시금 불러일으킨 건 며칠 전이었다.
[띵동 띵동]
초인종 소리에 얼른 현관으로 나가보니 이블린 아주머니가 서있었다.
"대범, 너희들이 꼭 봤으면 하는 게 있어서 왔어. 왜 예전에 애들이랑 같이 심은 양파 있지? 요즘은 날씨가 겨울 같지 않고 따뜻해서 이 전보다 빨리 싹이 텄어. 날이 더 따뜻해지면 꽃도 예쁘게 피겠지만, 지금 솟은 초록 순도 예뻐서 아이들에게 보여주면 좋을 것 같아."
좋은 생각이라 여겼다. 역시 교육자셨던 분이라 아이들에게 모든 과정을 보여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구나 싶었다. 내가 놓치고 있었던 것을 상기시켜주셔서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은 자기가 심은 양파에 싹이 올랐다고 신이 나서 찾아다녔다.
"그때 여기에 심었는데, 다른 건 어딨지?"
"이건 내가 심었는데, 내가 심은 게 더 크게 자랐다, 그렇지?"
그러나 그때까지도 나는 그저 양파의 싹이라고만 여겼다. 그 양파가 어떤 것인지는 그 뒤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우리 가족은 옆집 돌레와 토미를 집으로 초대해서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 독일은 누구 집에 초대를 받을 때면 항상 작은 선물을 준비한다. 화분이나 음료수, 와인 같은 것들이다. 돌레도 선물이라며 예쁜 꽃이 핀 화분을 건네주었다. 그런데 그 뿌리를 보고 나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예쁜 꽃의 정체는 바로 '양파'였던 것이다. 바로 그랬다. 이블린 아주머니가 심은 양파는 식용이 아니라 꽃을 보기 위한 관상용 식물이었던 것이다.
독일은 각 시즌마다 그 기간을 대표하는 기념물이 있다. 예를 들어 성탄절이라면 몇 달 전부터 상점이나 거리에는 '니콜라우스, 성탄트리, 성탄별, 아기 예수, 루돌프' 같은 장식들이 널린다. 등불을 들고 밤거리를 행진하는 '라테안축제' 기간에는 예쁜 전구와 등불이 전시된다. '카니발'이 다가오는 요즘은 여러 코스튬이 보인다.
이 양파는 사실 독일에선 봄의 시작을 기념하는 상징이다. 봄이 오는 어귀에 예쁜 꽃망울을 틔우는 식물인 게다. 우리나라로 치면 개나리나 진달래쯤 되는 유명한 봄 꽃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자 그동안의 고마움에 더하여 더 깊은 감사가 마음에 일었다. 한국에서 건너온 이방 아기들과 함께 다음 봄을 준비하고 싶어 했던 한스 귄터와 이블린의 마음이, 그 설레는 준비의 과정 하나하나를 알려주고 싶어 했던 그들의 따뜻한 마음이 오롯이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