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제야 수 시간 전, 이미 끝을 넘겼던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조심스레 덮었다. 비행기 창문 아래로 넓게 펼쳐진 푸른 평야가 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이제 곧 독일로 들어간다.
대학을 졸업한 후, 한 청소년 교육단체에서 꼭 8년간 일했다. 무척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결코 짧은 시간만은 아니었다. 한 곳에서 나름대로 길게 머무를 수 있었던 까닭은 아마도 내게 '일'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적어도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행복.
지나치리만큼 아름다운 이 단어는 어쩌면 사람들의 삶 속에서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priceless)이 아닐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나치리만큼 추상적인 단어라 또한 일상의 삶 속에서 쉽게 무시되는 존재(price of less)이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쉽게 가질 수 없는 것이 '꿈'이고, 쉽게 다다를 수 없는 것이 '이상'아닌가? 어쩌면 쉽게 손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그런 것이야 말로 길고 긴 인생의 푯대가 되기에 적당한 것이라 나는 믿었다. 적어도 그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청소년들에게 그 '행복'을 이야기했다. 너의 삶을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것을 너는 반드시 찾을 수 있다고, 아니 찾아야만 한다고 격려했었다.
“오늘 행복을 경험한 사람만이 내일도 행복한 삶을 만들 수 있다.”
그때 나는 분명히 그렇게 확신했었다.
그렇게 8년을 일했다. 그리고 그날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그런 평범한 날이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청소년들에게 짐짓 진지한 얼굴을 지어 보이며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너무 편안하게. 나는 이야기를 풀어갔다.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가 뱉은 내 말이 들리지가 않았다. 나의 입은 계속 말을 쏟아내고 있는데, 나의 귀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다시 귓속으로 들어오는 목소리는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나는 분명히 깨달았다.
‘아, 지금까지 나는 내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만 하고 있었구나.’
그랬다. 내가 스스로 분명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말은 사실, 다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내가 발견한 진실이 아닌 다른 사람의 발견이었다. 너무 잘 정리되어 있어 쉽게 따라 할 수 있었던 그 말들은 사실, 내가 스스로 확인해보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나는 그 말을 내 삶으로, 나의 불편함으로 맞바꾸어 본 적이 없었다. 너무 당연하게, 너무 자주, 내 입을 통해 뱉어 낸 말들이라 부지중에 나는 그것이 내 말이라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당당하게 도전을 이야기하던 나는, 내 심장의 고동을 언젠가부터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 있는 모습으로 행복을 이야기하던 나는, 정작 나의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살아가는 것은 원래 힘든 것이지, 누구나 그렇게 사는 것을. 나라고 별 수 있나?'
어른이 된다는 것은 가슴의 어리광에서 무뎌지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던 모양이다. 어른들은 철없는 가슴의 소리가 아니라, 사려 깊은 머리의 소리를 밖으로 내보이는 사람이라, 나는 믿었던 모양이다. 나는 8년 동안 '어른'이 되었지만, 8년 전 내가 꽃아 둔 인생의 푯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말한 행복은 '머리의 행복'이지, '가슴의 행복'이 아니었다. '가슴'이 없는 진실은 힘이 없는 법. 나는 초라하게 일그러진 '나의 진실'과 마주했다.
내가 부끄러웠다.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모든 것을 되돌리고 싶었다.
그것은 아주 단순한 마음이었다.
며칠 뒤, 나는 8년간 일했던 직장을 사직했다. 그렇다고 무슨 큰 계획과 목표를 세웠던 것은 아니었다. 몇 개월 전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된 독일 유학에 도전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세 자녀의 아버지로서 나의 결정은 무책임해 보이기도 했다. 미래에 대한 치밀한 준비가 없었기에 어수룩해 보이기도 했다. 지극히 즉흥적이었다. 지독히 감상적이었다. 그러나 명료했다.
그래서 끝이 어떻게 될지는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나는 지금 이 방향으로 가는 것이 가장 옳은 것이라 믿어졌다. 그것은 사려 깊은 머리의 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 가슴속 깊숙한 곳에서 오랜만에 힘찬 박동이 느껴졌다.
'가슴을 담은 진실이, 삶을 통과한 진실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다. 진실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복잡한 삶은 거기서부터 다시 풀어내면 된다.'
이젠 내가 그동안 쏟아냈던 타인의 말을 내 삶으로, 내 불편으로 증명해야 할 차례였다.
귀가 먹먹해졌다. 독일 땅이 다가옴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방금 막 덮어두었던 책을 무심코다시 펼쳤다. 그 속의 한 구절이 내 눈에 콕하고 박혔다.
“어제의 진실은 오늘의 진실이 아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가슴이 먹먹해졌다. 새로운 진실이, 새로운 오늘이, 새로운 시작이, 나에게로 다가옴이 온몸으로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