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월감>과 <열등감>에 대하여
사랑하는 첫째 딸에게
아빠가 늘 고맙게 생각하는 지온아.
문득 엄마 아빠의 성격을 쏙 빼닮은 너에게
지금의 독일 생활이 쉽지만은 않겠다 싶다.
아마 네가 네 살 때였나?
옆 집 오빠가 한글을 배우는 것을 본 뒤로
너는 엄빠 대신에 할머니를 졸라 기어코 한글 학습지를 샀더랬다.
그리고는 혼자서 한동안 끄적끄적하더니만
결국 한글을 혼자 떼더구나.
물론, 그때 아빠는 스스로 한글을 깨친 너보다
그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님께 더 놀랐지만.
이렇게 쓰다 보니 아빠가 너무 철이 없었네. 미안~
여하간, 네 속에 있는 "잘하고 싶다!"는 '목표'와 '욕심',
또 그것을 기어코 해내는 '근성'이 겉으로 드러날 때면,
아빠는 흠칫흠칫 놀라곤 한단다.
네 어미, 아비를 너무 똑 닮아서 말이지.
한국에서 쉽게 누릴 수 없었던 독일의 환경.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나무집과 정원,
마당 뒤로 펼쳐진 들판과 숲.
모두 너를 생각하며 알뜰히 살피고 준비한 것들이었는데...
어때, 너는 충분히 즐기고 있을까?
별생각 없이 자유롭게 뛰어놀며 웃고 떠드는 동생들과 달리
아빠는 가끔씩 딱딱하게 긴장한 네 표정을 보곤 한단다.
아마도 네 속에선 낯 선 환경과 생소한 언어에 적응하며,
"잘하고 싶다." 아니, "잘해야 한다."라고
너 자신을 채근하는 소리가 요동칠지 모르겠구나.
물론, 아빠도 네가 '잘' 했으면 좋겠어.
네 속에 있는 "잘하고 싶다"는 목표는 얼마나 긍정적인 욕심이니?
실제로 어떤 어른들 중에는 그런 동기를 개발하기 위해 훈련하는 사람도 많아.
그런데, 그리 길지 않은 아빠의 삶에서 아빠가 배운 사실이 하나 있어.
그것은 그 예쁘고 멋진 너만의 목표 위에다가
'누구처럼',
'누구보다'
같은 말을 절대로 더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끼는
내 감정과 내 기분에는 집중하기 어려워지거든.
현재의 감정과 기분을 무시하고 내일의 목적만 바라보고 걸어가면... 글쎄?
아빠의 경험상 목표한 바는 혹시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결코 행복감을 느낄 수는 없었던 것 같아.
사랑하는 내 딸, 지온아.
아빠는 네가 그저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먼저',
네가 '지금' 행복했으면 좋겠어.
나중에 우리 지온이가 아빠 정도 나이가 들어서
지금 이 순간을 떠올릴 때,
정확히 어떤 목표를 이뤘는지는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아, 그때 정말 행복했는데, 참 따뜻했는데.'
하는 느낌만은 꼭 떠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런 행복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어야,
이해할 수 있어야,
나중에 지온이가 커서도
그런 행복한 순간들을 만들어 갈 수 있지 않겠니?
아빠는 지온이가
내일 더 잘하기를 바라지 않아.
아빠는 지온이가
오늘 더 행복하길 바라.
사랑해, 우리 첫째.
지온이를 언제나 응원하는 아빠가
좀 낯부끄러운 뻔뻔한 고백이지만, 나는 학창시설 소위 '공부머리'가 있는 편이었다. 일명 '뺑뺑이'라고 불리던 고교평준화 시기에도 나는 특별한 전형을 통해서만 입학할 수 있는 '자립형 사립고등학교'에 진학했더랬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당시 내 중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께서는 그유명한 'S대학교' 정도는 들어갈 수 있을거라 말씀하기도 했다.
'어머, 미쳤나 봐! 이런 낯 뜨거운 잘난 척은...'
참고로 평소의 나는 이런 내 자랑을 대놓고 하는 것을 매우 불편해하는 지나치게 겸손한 사람임을 미리 밝혀두며 여러분들의 깊은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물론 이런 말이 더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것 같긴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그때의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나는 어떤 사람들이 바라볼 때에는 '똑똑한' 아이였지만, 언제나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들은 존재했다. 좀 거슬리는 말이 되겠지만, 나보다 성적이 낮은 사람들 앞에서는 '우월감'을 느꼈고, 나보다 성적이 높은 사람들을 바라보면 언제나 '열등감'을 느꼈다.
나는 항상 조급했다. 그리고 그 조급함은 나를 불안하게 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내게 남아있던 목표의 전부였던 '공부머리'마저 빼앗아갔다.
훗날 알게 되었다. 비교를 통해 얻은 우월감은 사실 열등감의 다른 얼굴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사실 대한민국 고등학생 중에 그 정도도 안 힘든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렇게 힘들어하는 아이들에게 누군가는 그렇게 위로했다.
"3년만. 딱 3년만 고생하면돼. 그렇게 눈 딱 감고 참으면, 그때부터 인생은 달라지는 거야."
<오늘>의 고생이 <내일>은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희망 섞인 말. 과연 그 말은 사실이었을까?
무엇이 진실인지 솔직히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 말은 사실이었을 수도 있고, 사실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적어도 그 말이 나에게는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전히 그때를 생각하면 나는 행복하지 못하다. 안타깝게도.
<오늘>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몰랐던 나는 <내일> 행복할 방법 역시 찾을 줄을 몰랐다.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행복 <유예>했던 나는, 오늘이라는 얼굴로 다가온 어제의 그 내일.
그 순간에도 결국 <똑같은 방식>으로 행복의 기회를 그 다음날로 밀어버렸기 때문이다.
늘 행복하고 싶다고 생각만 했지, 늘 <오늘의 얼굴로 다가온 행복>을 그 순간 마음껏 누리지 못했다.
나와 너무 닮은 내 딸과 내 아들을 보노라면 예전의 내 모습이 묘하게 겹친다. 이런 것이 어른들의 '노파심'이려나? 나와 아무리 똑같아 보이는 자녀라 할지라도, 결국 나와 다른 존재임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마음 속에서는 '혹시 우리 애들도 나처럼 그러면 어쩌지?'하는 마음에 심장이 덜컥덜컥 내려앉곤 한다.
내 아이들은 자신에게 조금은 더 여유로와졌으면 좋겠다.
자신을 채근하고, 재촉하여 앞으로 전진하게 하는 목소리도 분명 이따금씩은 필요하고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먼저!
있는 그대로의 지금 자기를 사랑하고, 응원하고, 격려할 줄 아는,
그런 따뜻한 목소리가 언제나 아이들의 내면에 깔려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너무 지나친 미래의 걱정으로 오늘의 즐거움을 제한하진 말기를.
좀 무모해 보이더라도 일단 부딪히고 보는 것은 사실 좋은 배움의 태도가 아닐까? 루소의 말 마따나 '배움은 말이나 지식보다 행동이나 감각'이 언제나 앞서가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