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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리아 Mulia May 14. 2021

익숙해진다는 건...

챙김과 귀찮음 사이 그 어디에서...

내가 처음 신랑을 만났을 때 신랑은 아침을 안 먹던 사람이었다. 대학생 때부터 본가에서 나와 자취를 했으니 서른한 살에 나랑 결혼할 때까지 그에게 아침이란 건 으레 안 먹는 한 끼였다. 친구들 중에도 아침을 안 먹는 애들이 많았는데 내가 연애 시절 신랑에게 집에 있는 밑반찬을 갖다 주고 가끔 된장찌개를 끓여준다고 하니 사서 고생이라며 나무랐다. 결혼하면 아침 챙겨주는 거 귀찮지 않겠냐고... ^^


하지만 나라는 사람 자체도 아침을 꼭 먹어야 하는 사람이라 챙겨주는 게 귀찮다는 생각은 안 했었고, 그런 나 때문에, 아니 덕분에? 결혼하고부터 우리 신랑은 못 먹던 아침을 먹으며 출근할 수 있게 되었다. 회사가 멀진 않지만 출근 시간이 일러서 신랑이 아침을 먹으려면 6시 반에는 먹어야 했고, 그 아침을 차려 주기 위해 난 6시에 일어났었다. 한 접시 요리를 좋아하는 아이들과는 달리 신랑은 메인 요리 이외에 사이드가 꼭 있어야 하는 사람인 데다 반찬도 많이 먹어서 늘 서너 가지 반찬은 있어야 했다. 계란 프라이는 필수...  신랑을 출근시키고 애들이 아침을 먹는 시간은 7시 반쯤이었으니 신랑에게 아침을 차려주던 그 시절엔 아침상만 두 번을 차렸다. 그런 일을 당연하게 여겼고 귀찮다는 생각 또한 한 적 없었다. 


그렇게 십오 년 가까이 아침을 먹다가 몇 년 전 신랑이 간헐적 단식을 시작한 후로 우리 집 아침 풍경이 달라졌다. 간헐적 단식을 하며 신랑은 하루 세끼 중 점심만 먹었었기에 아침도 저녁도 차릴 필요가 없어졌다. 물론 5일 정도 간헐적 단식을 하고 주말엔 치팅데이로 저녁을 먹었지만 그런 식습관이 꽤 오래 유지되었다. 평소 다이어트를 한다고 두부만 먹은 적도 바나나만 먹은 적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어찌나 까칠해지는지 내가 그럴 거면 하지 말라고 뭐라 했었던 때도 많아서, 간헐적 단식을 시작할 때도 얼마 안 가겠지 싶었는데 지금까지 잘 유지해 오고 있다. 운동도 하면서...


간헐적 단식을 하고 몸이 가벼워지면서 그 느낌이 좋았는지 신랑의 만족도는 꽤 높았다. 하지만 아침을 안 먹는다고 하니 벌써 부모님들의 걱정이 시작... 내가 안 차려주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나도 뭔가 모르게 불편하고... 그래서 시부모님과 전화하다 아침  이야기만 나오면 신랑을 바꿔주곤 했다. 이제 습관처럼 되어서 아무도 뭐라 하지 않으시고 되레 예전에 비해 많이 슬림해진 남편을 칭찬하시니 다행이다.


어쨌거나 신랑이 아침을 안 먹으니 내 아침 시간도 좀 여유로워졌다. 꼬박꼬박 아침을 먹던 아이들도 중학생이 되더니 아침 먹는 걸 힘들어해서 간단한 시리얼이나 주먹밥 종류로 차려주다 보니 아침상의 번거로움이 사라진 지 오래다. 요즘도 신랑은 아침을 안 먹고 출근하고 아이들은 간단하게 먹거나 때론 안 먹거나... 주말엔 다 챙겨 먹지만 저녁은 그때그때 다른데, 가끔 신랑도 평일에, 특히 술 먹은 다음 날엔 저녁을 먹겠다고 할 때가 있다. 습관이 무섭다고, 아침저녁을 나름 편하게 보내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가 가끔 신랑이 저녁을 먹겠다고 하면 괜히 분주해진다. 국이나 찌개라도 있으면 다행인데 간단히 먹으려고 아무것도 준비 안 했다가 갑자기 저녁 먹겠다고 퇴근길에 전화가 오면 그땐 진짜 난감하다.


지난 4월의 어느 날이 그랬다. 아들은 늦게 오고 신랑도 당연히 퇴근 후 운동하고 오겠지 싶어서 학원 마친 딸이랑 잠시 병원도 들를 겸 근처 아울렛에 갔다. 비염이 낫질 않아 병원을 바꿔보려고 간 거지만, 이왕 나왔으니 구경도 하고 저녁은 푸드코트에서 몇 가지 음식을 포장해 가기로 했다. 병원에서 진료 순서를 기다리는 데 신랑에게 걸려온 전화...  오늘은 운동 안 하고 집에 가니 저녁을 먹어야겠다고 한다. 심기가 불편해진 나는 아직 병원에 있으니 집에 있는 거 차려 먹으면 안 되겠냐고 했지만 신랑도 뭔가 귀찮은 목소리였다. 말로는 차려 먹겠다고 하는데 와서 차려주면 안 되겠냐는 그 숨길 수 없는 뉘앙스... 언제 끝날 것 같냐, 기다리겠다...  아 진짜... 애도 아니고 말이지...


사실, 바로 들어가려면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딸과 둘이 나와서 쇼핑몰도 둘러보고 싶었는데 음식만 후다닥 사서 들어가게 생겼으니 딸도 나도 시무룩... 집에 반찬도 많았다 그날은... 두릅이 나오던 시기라 두릅도 데쳐놨었고, 육전과 카레도 해 놓았으며 심지어 국도 끓여 놨다. 다 있으니 꺼내서 데울 거 데워서 먹기만 하면 되는데 이 남자 진짜... 아예 안 해봤던 사람도 아닌데 그날은 더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결국 계란 김밥이랑 새우튀김만 후딱 사 들고 들어와서 집에 있는 반찬들로 대강 차려서 저녁을 먹었다. 뭐 대단한 거라고,  자취 경력이 몇 년인데.... 할 줄 모른다기보단 귀찮아 안 하려는 게 너무 보여서 그날은 신랑이 어찌나 얄미워 보이던지... ^^ 하지만 신랑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혼자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어쩌다 한 끼 먹는 건데 내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싶은 거라는 거... 하다 못해 라면 한 그릇을 먹어도 말이다. 열심히 다 먹고 싹싹 비워진 그릇을 보며 신랑이 하는 말... "내가 차려도 되는데 우리 마누라가 차려줘야 맛있지... 다 비웠어, 잘했지?"... 미안하긴 했나 보다.


생각해 보면, 신랑을 그렇게 길들인 건 어쩜 나일지도... 안 먹던 아침을 먹게 한 데다, 혼자 하던 걸 내가 다 챙겨 줬으니 신랑도 그런 챙김을 받으니 좋았을 거다. 내가 잘했다는 얘기가 절대 아니다. 새벽에 일어나 아침상을 차려줬었던 그 시간들을 한 번도 귀찮아했던 적 없고, 아이들이나 신랑이나 당연히 챙겨줘야 할 사람들이라는 거... 그게 엄마로서 아내로서의 내 역할 중 하나라는 걸 충분히 안다. 나 역시 그들에게 챙김을 받으며 사니까... 하지만 알게 모르게 익숙함에 젖어 느슨해진 틈으로 귀찮음이라는 게 스멀스멀 들어올 때도 있으니까... 그날이 바로 그런 하루였다.


단지 먹는 일뿐 아니라 다른 일도 마찬가지다. 내가 할 수 있지만 누가 해 주니까 안 하게 되고 미루게 되는 일... 참 많다. 어느 한쪽이 불평을 안 하게 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서운함이 쌓일 수도 있는 일... 할 줄 아는데 모르는 것처럼 물어볼 땐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끓어오른다. 내가 뭘 좀 해 달라고 하면 잘해 주는 신랑이지만, 말하고 바로 실행에 옮겨줬으면 하는 나에 비해 신랑은 빨리 움직이는 편이 아니다. 신랑의 변명은 이런 것... 해주겠다고 한 건 꼭 해줄 건데 언제라도 하면 되지 왜 그러냐고... 신랑이 가끔 그럴 때마다 내가 놀리며 한마디 한다. "희생하며 살고 싶다며... 이게 희생하는 거야?"라고...




신랑과 결혼 전, 신랑이 내게 했던 말... "난 희생하며 살고 싶어..." 하하...  가끔 장난 섞어 말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너무 웃기다. 그 말인즉슨, 자기를 다 바쳐 나를 위해 살겠다는 거였는데... 음... 이젠 상황이 바뀌어 거의 내가 왕을 모시고 사는 무수리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물론 신랑이 나를 위해 해 주는 일도 엄청 많다. 또 가족 중심적인 사람이라 챙기기도 잘하고... 하지만 예전엔 알아서 척척했던 일들을 이젠 귀찮아하고 내가 해주기만 바라며 더 안 하려 하니 가끔 그럴 땐 나의 따가운 눈총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수밖에...


며칠 전 밤에도... 두통도 다 안 가시고 몸살기도 있어 일찍 누웠었다. 코스트코에 잠깐 들렀다 아들 픽업도 다녀온 신랑은...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결국 살짝 잠이 든 나를 깨웠다. '샐러드는 물에 한 번만 씻으면 되지?'라는 그 한마디로... 아들에게 닭 가슴살 샐러드를 챙겨주려는 듯했는데 그것까진 좋지만 알아서 좀 하시지... 샐러드를 물에 씻지 그럼 어디에 씻게? 내가 주섬주섬 일어나려 하니 자기가 한다고, 자라고는 했지만 귀찮음이 잔뜩 묻어있는 뒷모습... 나도 몸을 일으키기 너무 귀찮았지만 그래도 아들 왔으니 아는 척도 해줄 겸 꾸역꾸역 나가서 준비해 주고 들어왔다.


만약 이 글을 부모님들이 보시면 뭐라고 하실까? 꼭 부모님이 아니더라도 밥 챙겨주는 당연한 일을 하면서 생색낸다고, 유난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 사실 참 별거 아닌데...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늘 해오던 일들이어도 가끔 뭔가를 챙긴다는 게 좀 크게 느껴질 때가 있다. 챙겨 주는 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싶지만 이젠 나도 갱년기가 슬슬 다가오려는지 자주 몸이 피곤해지기 시작하니 챙겨주는 기쁨보다는 귀찮음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올 때가 더 많은 게 사실이다. 특히 컨디션이 안 좋을 땐 더더욱... 


내가 이렇게 느끼는 것처럼 신랑도 같이 느끼겠지... 하지만 귀찮다고 자꾸 말로 내뱉으면 더 귀찮아지니 그렇게 되기 전에 좀 더 세심하게 살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서로가 서로를... 우린 사랑하는 가족이니까... 어제 신랑과 같이 건강검진이 있었다. 마시기 괴로운 대장내시경 약을 들이켜면서 그래도 혼자 보다는 둘이 낫다는 생각을 해 본다. 혼자 마시려면 더 괴로웠을 텐데 그래도 새벽 네시에 둘이 마주 앉아 마시고 있으니 덜 심심하고... 있을 때 잘하라는 말... 괜한 말이 아닐 거다. 이렇게 지지고 볶는 사소한 일상 또한 시간이 지나면 하고 싶어도 못하게 될 그리움이니 지금을 행복으로 여기며 살라는 얘기겠지... 근데 자기야... 희생이 뭐야? 희생이 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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