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리아 Mulia Apr 16. 2021

엄마, 또 울어?

아직 덜 자란 울보 엄마가 흘리고 싶은 눈물...

나이가 들면서 특히 작년부터는 눈의 상태가 부쩍 안 좋아졌음을 자주 느낀다. 일이야 늘 노트북으로 하지만 블로그를 하면서 부쩍 핸드폰을 보는 시간이 많아진 데다, 나 같은 경우는 작정하고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쓸 때보다 그냥 조각조각 떠오르는 이야기들을 그때그때 적기 위해 핸드폰으로 글을 쓰는 경우가 많으니, 아무래도 눈의 피로도가 이전보다 좀 더 심해진 것처럼 느껴진다.


기본적으로 안구건조증이 있는 데다 가끔 알레르기로 눈이 충혈될 때도 많다. 이젠 노안이 오는 나이라 어느 순간 글씨나 내 앞에 보이는 사물이 희미하게 보이는 경험을 자주 한다. 지난겨울에 특히 심했던 터라 그때부터 블로그나 브런치 댓글 알람들을 다 꺼 놓고 밤에는 핸드폰을 되도록이면 보지 않으려고 디지털 디톡스를 했다. 눈에 좋다는 루테인이나 메리골드 차도 열심히 마셔 봤지만 눈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고 급기야 이러다 시력이 확 떨어져 잘 안 보이게 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마저 들었다.


이병률 시인은 그의 책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에서 "나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게 가장 두려울 것 같았고, 그것을 어떻게 해보려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실명하는 것. 나는 여전히 그것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라고 했는데, 점점 눈 상태가 안 좋아지니 갑자기 전에 읽었던 책 속 구절까지 생각나며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급히 찾은 안과... 예약도 힘든 곳이라 한번 가면 미리 접수를 한다 하더라도 몇 시간의 대기는 기본인 곳... 그 수고로움이 두려움을 앞서는 상황이어서 한동안 안과검진을 미루었던 아이들까지 데리고 기꺼이 기다렸다. 기본 검사를 마치고 드디어 선생님을 만나는 시간... 얼마나 안 좋아졌을까, 그동안 왜 이렇게 검진을 안 왔는지 혼나진 않을까, 마음의 각오를 하고 잔뜩 긴장했는데 진찰을 끝내신 선생님은...


"눈 상태 좋으신데요? 노안이 오긴 했지만 이 정도면 상위 1프로의 상태입니다. 걱정 마세요. 이 정도 안구건조증이야 누구나 다 있는 거고, 시력도 이만하면 좋으십니다."

"정말요? 전 많이 안 좋을 줄 알았어요. 걱정할 거 아니라니 다행인데 가끔 글씨가 잘 안 보일 때가 있어요. 돋보기 써야 할 정도는 아닌가요?"

"아직 아니에요. 제가 환자분보다 나이가 많은데 아직 저도 돋보기 안 씁니다. 버틸 때까지 버티려고요. 일단 너무 피곤하게만 하지 마세요."


내가 느끼는 상태와는 달리 일단 눈 건강이 나쁘지 않다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이긴 한데 그 뒤로도 눈이 계속 불편하니 의사 선생님의 진단 결과에 자꾸 의심이 들었다. 상위 1프로라는데 그 말 믿어도 되는 거야?


이상이 없다니 자꾸 검사하는 건 의미가 없고 그냥 최대한 눈을 덜 피로하게 하는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하며 요즘도 그렇게 좋고 나쁨의 상태를 반복하며 살고 있다. 매일매일 루테인과 지아잔틴을 챙겨 먹고, 밤늦은 시간에는 가급적 핸드폰 화면을 보지 않으려 하고(사실 잘 안되지만), 잠들기 전 스팀 안대를 사용하여 눈 주위의 혈액 순환을 좋게 해 준다. 안구건조증이 있다고는 하지만 눈의 건강상태가 노안치곤 상위 1프로라고 하는 건 어쩌면... 내가 남들보다 눈물이 유독 많아서가 아닐까 하는 지극히 단순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건강학적 측면에서 '잘 우는 사람이 오래 산다'는 말도 들어본 것 같고, 감정적으로 우는 경우엔 스트레스를 받을 때 분비되는 '카테콜아민'이라는 호르몬이 눈물 속에 섞여 배출된다니 말이다.


어릴 때부터 잘 울어서 유치원 시절부터 나를 알던 엄마 친구분들은 한동안 나를 울보라고 놀리셨다. 대학을 가고 취직을 하고 시집을 갈 때도 "아이고 이 울보가 언제 커서 이렇게 시집을 간다니..." 하며 놀라움 섞인 기특함으로 나를 보시곤 했다. 어릴 때 흘리는 눈물과 지금의 눈물은 좀 그 의미면에서 차이가 좀 있긴 하겠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나이만큼 충분히 운 것 같은데도 여전히 나는 눈물이 많다.


눈물의 종류에는 눈을 보호하기 위해 나오는 '생리적 눈물', 양파나 마늘, 고추를 다룰 때 생기는 '자극 반응에 의한 눈물', 스트레스나 슬픔 기쁨 등으로 인한 '감정적 눈물'이 있다는데, 내가 흘리는 눈물의 대부분의 지분은 '감정적 눈물'에 있어 보인다. 나도 모르게 나오는 생리적 눈물이야 내가 인지하지 못하고, 눈 매움을 일으키는 음식으로 인한 자극 반응으로는 의외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대부분은 어떤 일로 속상해서 울거나, 책이나 영화, 드라마 속 누군가의 이야기에 공감되어 우는 '감정적 눈물'인 경우가 대부분.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감정적 눈물을 제일 많이 흘리겠지만, 우리 집 식구들이나 주변 지인들과 비교해 봐도 같은 상황에서 내가 흘리는 감정적 눈물의 빈도가 그들에 비해 상당히 높아 보인다.


신랑은 이런 나를 보고 특정 상황에 지나치게 몰입을 잘해서 그런 것 같다는데... 드라마나 영화 혹은 가슴 아픈 뉴스, 누군가의 힘든 이야기가 담긴 글들을 접할 땐 마치 내가 겪는 일인 듯 눈물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흐른다. 집에서 온 식구가 다 같은 영화를 봐도... 특정 장면에서 울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뭔가 슬픈 장면들이 영화나 드라마 속에 나오면 우리 식구들은 그 장면에 몰입하기보단 일제히 소파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은 채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나를 쳐다본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엄마 또 울어?", "와... 이건 좀 오번데..." 라거나, 가만있음 중간쯤 갈 것 같은 신랑까지  "얘들아. 엄마 또 운다..." 라며 놀리듯 말한다.


이러니... 그들은 쓸데없이 눈물 많은 나를 이해 못하고, 나는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것 같은 그들을 이해 못한다. 사람마다 감정을 느끼는 정도나 깊이가 다르니 어느 경우가 맞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누가 봐도 슬픈 일인데 나만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는 그야말로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한 번은 아이들에게 물어봤다.


"얘들아 너희들은 진짜 아무렇지 않니? 안 슬퍼?"

"나도 슬퍼. 근데 엄마... 그냥 영화잖아... 그냥 영화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보는 거야. 엄만 그걸 너무 현실하고 연결시켜서 그런 거고... "

"그래도... 내가 그 입장이라면, 내가 저런 일을 겪는 거라고 생각하면 슬프지 않아?"

"슬프지... 근데 엄마가 느끼는 그런 것만큼은 아니야..."


그래... 슬픔도 주관적인 느낌인 데다 내가 쌓은 경험치와도 연결되는 부분인 거니까... 어쩌면 아이들에게 아직은 세상의 중심이 자기이고,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면서 크게 고통스러운 기억이 없었으니 극단적인 상황에 대한 감정적인 공감대가 덜한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라면 차라리 다행이겠구나 싶다가도, 그래도 '너무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시작된다. 하지만 아이들도 알고 있을 거다. 누군가의 슬픈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아니어서 감사하다는 사실을... 엄마처럼 꺽꺽 거리며 울지 않아도 굳이 지금의 삶에 그런 고통을 아직은 느끼고 싶지 않은 그런 마음일 거라는 것을...


특히 큰 아이는 어린 시절부터 '슬픔'이란 감정을 아예 자기감정에서 빼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내가 어쩌다 아파도 아픈 나를 걱정하기보다는 내가 아파서 벌어질 상황에 더 집중했었다. 아이 나름대로 느끼는 불안과 슬픔의 표시였을 거라 이해하지만 어떤 아이는 엄마가 아플 때 엄마 이마에 손도 얹어 보고 빨리 나으라고 말도 한다는데, 내가 아플 때 더 보채고 징징거리는 아이를 안심시키는 일이 그 당시 나에겐 참 힘들었다. 잠들기 전 책을 읽어 줄 때도 슬픈 이야기나 무서운 이야기는 아예 골라오지 않았었다. 그런 책들은 자기가 알아서 제목이 보이지 않도록 반대로 책을 꽂아 책장 끝쪽으로 밀어 두었다.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본능적으로 슬픔이나 무서움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아 하는 듯 보였었다. 아이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니 나도 굳이 그런 이야기들을 애써 보여주려 하지 않았었는데 이건 마치 내가... 우리나라 근대문학, 특히 1950년 이전에 쓰인 단편 소설들, 겪어보지 않았어도 그 고통이 그대로 느껴지는 그런 이야기들을 통해 드러나는 슬픔이나 아픔 혹은 불편함 들을 애써 느끼고 싶지 않았던 것과 같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나중에 들었다.


하지만 뉴스나 소설 속에 담긴 우리의 이야기들이 피한다고 피해질 이야기던가... 아이를 키우면서, 나이 들어가시는 부모님을 보면서도, 또 내 주변의 사람들과 엮어가는 일상의 이야기 속에서도 그들의 이야기는 언젠가 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음을... 하루하루 삶을 살아가면서 더 많이 느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겪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은 그 감정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나의 현재를 돌아보고 늘 잊어버리는 감사함을 다시 깨닫기도 한다.


"슬픔은 모든 눈물의 속옷과도 같다. 무슨 연유로 울든 간에, 그 가장 안쪽에는 속옷과도 같은 슬픔이 배어 있다. 감격적인 순간에도 참회의 순간에도 환희의 순간에도, 우리는 알지 못할 슬픔에 둘러싸여서 눈물을 흘린다.(김소연의 마음사전 중)"


나에게 화가 나서도 울고, 누군가와의 이별의 순간에도 울고, 아이에게 미안해서도 울고, 아이들이나 신랑과 싸운 후 속상해서도 울고, 지나간 어떤 순간이 가슴 미어지게 아려서도 울고... 뉴스에 나올 만큼 드라마틱한 사건은 없었어도 내가 지나온 수없는 순간들에 나의 울음과 눈물이 참 많이도 담겼다. 자연스러운 감정의 변화로 흐르는 눈물... 요즘은 갱년기가 다가오려고 해서인지 자꾸 울컥해져서 문제 인긴 하지만 그래도 어떤 공감도 하지 못하거나 감정이 메말라 버려 눈물을 흘릴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주책이라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내가... 누군가의 아픔이나 격한 감정에 거짓이 아닌 진심 어린 공감으로 같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살아가면서 많은 행복과 감사를 느끼지만 눈물을 흘릴 시간들 역시 많이 남았음을 안다. 지극히 평범한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아직은 곱게 살아가고 있는 편이지만 생로병사로 얽혀있는 부모와의 이별의 순간, 품 안의 자식을 떠나보내야 하는 이별의 순간들을 나 역시 예외 없이 겪어야 하기에 아직은 다가오지 않은 그 시간들을 떠올려 보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심하게 요동친다. 


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반복한다 해도 익숙해지지 않을 그런 슬픔은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꼭 겪어야 하는 슬픔이라면 그 시간이 아주아주 늦게 찾아오기를 소망한다. 오로지 내 감정에만 충실해 눈물을 흘리는 지금의 시간들...  "엄마, 또 울어?"라는 아이들의 놀림 섞인 말을 들어도 가슴 미어지는 큰 슬픔 없이 책을 읽고, 드라마나 영화를 보며 울 수 있는 지금 이 순간들만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투정 같은 욕심을 오늘도 또 부려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보통의 하루, 무뎌진 값짐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