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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을 키우는 학교, ‘기다림’이 필요할 때

- 학교자치의 현주소

by 까미노

비밀 아닌 비밀투표

얼마 전 큰아들이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서 자기방에서 나왔다.


“왜 그래?”

“아니, 9시에 줌(Zoom)한다고 해서 들어갔는데 이제 끝났어.”


벽시계는 11시가 다되어 가고 있었다. 단순히 수업이 늦게 끝나서 화가 난 것은 아닌 거 같았는데 더이상 묻지 않았다. 한소끔 시간이 흘렀을까 소파에 앉아서 휴대폰을 보고 있는 큰아들에게 아까 왜 그렇게 화가 잔뜩 났는지 조용히 물었다. 큰아들이 들려준 얘기는 이랬다.


나흘 전 개학날, 담임선생님께서 ‘8월 31일 자치시간에 2학기 학급임원선거를 한다’고 하셨어요. 출마할 사람은 개인적으로 신청하라고 했고요. 그런데 오늘 아침 8시 45분에 메시지가 떴어요. Zoom으로 반장선거를 하니까 9시까지 모두 줌으로 들어오라고요. 놀라서 씻고 윗옷만 갈아입고 컴퓨터를 켰어요. 애들도 갑작스러운 공지라 모이는 데 30분 넘게 걸렸어요. 2명은 아예 참여하지 못했고요. 후보도 그때 알았어요. 사전에 정보가 없었거든요. 후보들의 소견 발표는 시간‧내용 다 준비가 덜 된 티가 났고요. 바로 투표가 진행됐는데…. 선택한 후보의 이름을 담임선생님께 비밀채팅으로 보내야 했어요! 선생님은 제 선택을 훤히 알 수 있는 상황이잖아요. 찜찜했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한 명의 이름을 적어 보냈어요.



자치의 경험도 역량도 없이 어떻게 ‘학교자치’를 말할까

큰아들의 얘기를 들으며 1학기말에 진행된 교직원협의회 모습이 겹쳐졌다. 우리학교의 ‘교직원회’ 규정을 정하고, 의장을 선출하기 위한 자리였다. 사전협의는 옹색한 전달 연수로 대체됐고, 고사리손의 도움도 절실하게 필요한 학기말에 계단식 구조의 시청각실로 장소를 잡은 거 부터가 처음부터 협의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경기도학교자치조례에 협의가 가능한 내용이라고 적혀 있는 것과 우리학교 교직원회의 협의 내용이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유일한 내 질문이 끝나자 곧장 의장 선출을 위한 투표가 진행됐고, 그 협의회를 진행한 담당 부장교사가 의장으로 선출됐다. 매우 중요한 일을 몇 사람이 모여서 초안을 만들고, 연중 가장 바쁜 시기에 충분한 검토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급히 진행되는 것이 큰아들의 학급임원선거와 흡사했다. 현임교 재직경력이 1년 이상인 의장후보 명단이 적힌 종이에 직접 표기해서 바구니에 넣는 형식으로 진행돼 비밀이 유지됐다는 것만 달랐을 뿐이다.

경기도교육청은 지난해 11월에 ‘학교자치조례’를 제정‧공표했다. 조례에 맞게 학교에서도 교직원회를 만들라고 지침이 올해 초에 내려왔고, 학교별로 교직원회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고하라는 공문은 1학기가 끝날 무렵에 내려왔다. 학교에서 학기말에 부랴부랴 교직원회를 조직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학교자치’는 무엇이고, 왜 ‘조례’로 만들어 학교에 내려보냈는지, 우리학교에 맞는 조직은 어떤 것인지에 관해 논의할 시간은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학생에게는 기회를, 교사에게는 신뢰를

코로나19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수도권은 다시 3분의 1의 학생만 등교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그것도 9월 11일까지는 (고3을 제외하고) 모두 원격수업으로 진행하라고 방학 중간에 정부의 지침이 내려왔다. 따라서 등교해서 진행하기로 했던 ‘2학기 학급임원선거’도 원격으로 진행해야 했다. 교직경력 20여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기에 다른 학교는 어떻게 했는지 참고하고자 아는 선생님들을 통해 그 학교들의 사정을 알아보았다. 다소 차이는 있으나 대부분 담임교사의 주도 하에 선거가 진행이 됐으며, 투표도 담임만 알 수 있게 적어 보내는 방식이었다. 선거의 4대 원칙 중 ‘비밀선거’가 지금의 ‘비상상황’에서 지켜지지 않는 게 교육공동체에서 용납된 것이다.


하지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디작은 교육공동체라도 학생들에겐 대표를 선출하는 ‘민주 시민 교육’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우리반 학급임원선거는 선거의 원칙을 지키면서 하고 싶은 마음에 학급선관위원들과 급히 논의를 했다. 선거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한 만큼 대안을 찾기로 했다. 첫 회의에서는 전체적인 진행 과정과 진행상의 문제점을 공유하는 것으로 끝내고, 각자 대안을 찾아 다음 회의에서 논의하기로 했다. 담임이 주도하게 되면, 선거 경험이 부족한 학생들이 담임의 의지대로 따라올 가능성이 커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시간을 줬다.


결국 학급선관위는 포털사이트에 있는 설문방식을 활용하되, 한 개의 IP에 한 번만 투표가 가능하게 설정하고 익명으로 투표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누가 누구를 선택했는지는 운영자도 알 수 없는 구조라고 했다. 선관위원들은 후보등록부터 소견발표회까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잘 진행했다. 온라인 선거운동도 3분 이내의 홍보영상을 제작해 공유토록 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과연 우리가 지금 학교자치를 얘기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교사들 거의 대부분 학창시절에 자치에 대해 배우거나 경험한 적이 없는 상황에서 교사가 되었고, 교사가 된 이후에도 이 부분에 대한 역량을 키우는데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니 학급임원선거의 과정도 자신의 경험치에서 판단하여 학생들에게 맡기는 것을 못 미더워하며 전과정을 담임이 주도하면서 진행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학교자치’는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에서 요원한 것인가?


코로나19로 인한 학교의 혼란은 1학기와 함께 잦아드는 듯 했다. 2학기를 앞두고 사회적 거리 두기가 격상돼 또다른 혼란이 찾아왔지만 지난 3월만큼은 아닌 듯하다. 학교현장의 대응 역량이 그만큼 커졌음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숱한 시행착오의 결실이다. 아이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시행착오를 거쳐서 성장할 기회가 주어져야 하며,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시간을 주고 믿고 기다려 줄 필요가 있다. 학교는 학생에게 공부와 함께 많은 것을 가르친다. 시민으로의 성장도 교육 목표 중 하나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민주 사회의, 시민의 ‘기본’을 우선 알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비상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효율적인 대처’는 지금보다 다른 방식이어야 한다. 그 방식은 신뢰라는 바탕 위에, 원칙은 준수하는 방향이어야 하지 않을까. 경기도교육연구원 홍섭근연구사의 글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친다.


‘학교자치는 문건이나 정책으로만 존재해서도 안 되고 가능하지도 않으며, 여백이 있지만 일단 시행해 보는데 초점이 있을 수 있다. 코로나19 상황에서 교육부나 시·도교육청은 불가피하게 학교에 많은 재량권을 주었지만, 문제되는 것은 없었다. (중략) 앞으로 학교공동체를 신뢰하고, 믿고 맡기는 데서 학교자치가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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