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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반 출입금지

by 까미노

- 꼰대가 말하는 '꼰대 없는 교실'

어떤 일을 할 때 내 의지대로 해야 속이 시원하다.

다른 사람들과 의견 충돌이 있을 때 우선 큰 소리를 지르고 본다.

학생들의 잘못된 행동을 보면 “요즘 애들은 이래서 문제야.”라는 말이 먼저 나간다.


인터넷에 떠도는 ‘꼰대의 특징’이다. 이 세 가지 특징 중에 나는 어느 하나에도 ‘해당 없음’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드라마를 보면 학생들이 교사를 ‘꼰대’라고 부르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꼰대는 ‘본래 아버지나 교사 등 나이 많은 남자를 가리켜 학생이나 청소년들이 쓰던 은어’라고 하니 오십에 가까운 나이 많은 남자 교사인 나는 영락없이 꼰대다.

이런 꼰대가 교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낸 20여 년의 시간을 거슬러 보니 교사라는 권위를 내세워 그동안 수많은 ‘꼰대짓’을 했음에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과거만 돌아보고 언제까지 반성만 하고 있을 수는 없기에 (내게는 정년까지 아직도 10년이 넘게 남아 있으니) 앞으로라도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교육활동을 ‘학생의 자기 결정권’에 중심을 두고 생활해 보려고 한다.

타반 출입금지

다른 학교에 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버릇처럼 하는 것이 있다. 일부러 교실 문 쪽으로 가서 살펴본다. 매번은 아니지만 자주 만나는 글귀가 있다.

‘타반 출입금지’

때로는 좀 더 부드럽게 호소(?)하는 예도 있다.

‘*학년 *반이 편히 쉴 공간입니다. 다른 반 학생의 출입을 금지합니다. 문을 살포시 닫아주세요.’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그 맥락은 매 한 가지다.

‘우리만의 공간에 다른 반 학생이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

해당 반 담임교사에게 왜 이런 걸 붙였냐고? 이유를 묻지 않아도 뻔히 우리는 알 수 있다.

‘다른 반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어서 조용히 있고 싶어 하는 우리 반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

‘우리 반 학생의 물건을 허락을 구하지 않고 마음대로 손을 대거나 가져가는 행위’

‘교실 문을 막고 서서 얘기를 나누는 바람에 출입하는 우리 반 아이들에게 불편을 주는 행위’

이런 행위들을 그동안 자주 목격하거나 그로 인한 불편함을 반 아이들을 통해서 들었기에 담임교사는 그럴 때마다 여러 가지 표현으로 교실 문에 경고문을 붙여왔다.


입학식을 하고 한 달 정도 지났을 무렵에 서너 명의 여학생들이 교무실로 찾아왔다. 그 아이들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선생님, 우리도 2학년 교실처럼 문에 붙이면 안 돼요?”

“뭐를?”

“다른 반 학생들 못 들어오게요.”

그때 마침 쉬는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려서 우리는 이야기를 더 나누지 못하고, 이 문제를 종례 때 다시 얘기하기로 잠시 미루었다.


종례 시간에 이 부분에 관해서 얘기를 꺼내자 갑자기 봇물이 터지듯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넘쳐난다. 이때의 분위기로 봐서는 당장 A4용지에 붉은 유성 매직으로 ‘타반 출입금지’ 여섯 자를 적어서 붙여야 할 거 같았다.

“너희들이 이렇게 원하면 선생님이 지금이라도 붙여줄 수 있어. 그런데 우리 반에 그걸 붙이면 다른 반 아이들이 못 들어오겠지만, 우리도 그때부터는 다른 반에 못 들어갈 텐데 괜찮아?”

활활 타오르던 불길에 찬물을 쏟아부은 듯 순식간에 교실은 적막감에 휩싸였다. 마침 담임 겸 1학년 부장을 하고 있을 때라 이렇게 다시 제안했다.

“우리 반 교실 문에 ‘타반 출입금지’를 붙인다고 해결될 게 아니니 1학년 모든 반에서 이 주제로 학급 회의를 해보면 어떨까? 그래서 학년 전체가 같이 결정하면 훨씬 효과가 좋을 거 같은데.”


결국 반 아이들뿐만 아니라 1학년 담임들에게도 동의를 구해 우리 1학년의 첫 번째 학급자치회의 주제는 ‘타반 학생의 출입을 허용할 것인가? 금지할 것인가?’로 정해서 진행이 되었다. 각반 학급자치 회의에서 내린 최종 의견을 가지고 4개 반의 학급자치 임원들이 다시 한 자리에 모여 토론 끝에 이 문제에 관한 학년 전체의 결정을 내렸다.


뒤에 전해들은 얘기로는, 학급자치회의 결과 4개 반 중에서 3개 반이 다른 반 학생의 출입을 허용하자는 쪽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반대한 1반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여 다른 반 학생의 출입을 허용하되 우려가 되는 부분을 단서 조항으로 넣어 자율적으로 지킬 수 있도록 하자는 쪽으로 결정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1주일이 지나자 다시 이 문제가 불거졌다. 우리 반에 들어와서 시끄럽게 떠들어 경고 세 번을 받은 다른 반 학생이 찾아왔다.

“선생님, 저는 이런 거 몰랐다고요. 그리고 ‘경고’라는 말도 못 들었어요.”


여러 번 같은 얘기를 해도 난생처음 듣는 말인 양 되묻기를 반복하는 게 이 또래 아이들이기에 이 학생의 문제 제기가 낯설지 않았다. 분명 학급자치 회의에서 다루었고 학년자치회의에서 나온 결과를 공지했을 텐데 그게 모든 아이에게 체화되기에는 시간이 많지 않았을 것이기에 우리는 임시학급회의를 열어서 전체 학생들이 인식할 수 있도록 재차 안내했고, ‘경고는 상대가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하자’는 세부안도 추가로 만들게 되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겪은 뒤로 우리 학년에서 ‘타반 출입금지’에 관한 얘기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만약 담임이 주도해 교실 문에 경고문을 붙이고, 이를 어긴 학생들을 매번 혼을 내거나 어떤 조처를 했다면 이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이 되었을까? 장담컨대 절대로 근본적인 해결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타반 출입금지’를 보면서 내가 가진 의문은 하나다. 대부분 학교는 ‘공동체’를 넣은 교육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혁신학교의 교육 비전에는 거의 100%에 가깝게 ‘@@ 공동체’라는 말이 들어간다. 우리는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혼자서 살 수 없고 남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라고 가르치며 학생들의 이기적인 생활 태도를 지적하고, 여러 명이 함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모둠활동을 넣어 수업을 설계하고 있다. 그렇게 공동체의 중요성을 얘기하면서 교실에서는 너무나 쉽게 나(우리반)의 이익만을 위해서 결정을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교실에서 사회생활에 필요한 질서와 규칙을 배우고 실천한다’라는 항목에서 ‘그렇다’라고 대답한 우리나라 학생들의 비율이 프랑스나 영국과 비교해 3분의 1 정도밖에 안 된다는 연구 결과를 본 적 있다. 이제 더는 ‘공동체’를 거창한 구호 속에서가 아니라 교실에 살아 있는 삶의 실천의 과정에서 우리 아이들이 만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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