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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로서의 환대

-지역에서 혁신교육을 위해 애쓰고 계신 분들을 생각하며

by 까미노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훔쳐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소년원에서 국어 수업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서현숙 선생님의 ‘소년을 읽다’를 며칠 전부터 읽고 있는데 그곳에서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을 만났다. 그전에도 몇 번 만났던 시(詩)인데 오늘따라 사뭇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올해 ‘지역전문가과정’의 자료집에 들어갈 에세이를 써 보라는 연구사님의 말씀을 들어서인가 보다.


지역전문가 과정에 참여하는 멘토들(‘멘토’라는 호칭이 너무 과분하여 쓰고 싶지 않지만 그렇게 부르기로 연수원에서 정했으니 그냥 쓰고 있음을 양해해 주기 바람)은 퇴근 후 2시간가량 진행된 줌 회의에서 상당한 시간을 지역전문가과정에 참여하는 선생님들에 대한 ‘환대’를 주제로 얘기를 나눴다. 교육과정 첫날, 가벼우면서도 따듯한 만남을 준비하자는 것이었는데, 어떻게 해야 참여하시는 분들의 부담을 덜어주면서도 마음을 편안하게 열 수 있을까에 대해 엄청 뜨겁게 논의했다.



7년 만이다, 가족이 있는 시흥으로 다시 돌아온 게. 혁신의 바람도 거의 불지 않고 있던 경기도 광주시의 면 단위 중학교로 7년 전에 전근하였었다. 생활근거지인 시흥 집에서 학교까지 출근길만 편도 60km가 넘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야 교통지옥을 피해 안전하게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학교로의 선택은 전적으로 ‘작은 시골 학교에서 학교가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처음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해 보고 싶다’라는 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아니 기쁜 마음으로 새벽잠을 떨쳐내며 출근길에 나섰다.


하지만 전근 첫해, 학교는 한두 사람에 의해 쉽게 바뀌지 않는 곳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혁신부장의 자리를 내놨다. 학교의 변화를 바라는 교장 선생님과 예전부터 해오던 방식을 고집하는 교사들 사이에서 깜냥이 안 되는 내가 더는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가 없었다. 초빙교사라 의무적으로 있어야 하는 남은 3년만 꾸역꾸역 버티다 시흥으로 다시 돌아가리라는 마음을 먹고 있는데 교장 선생님께서는 “혁신부장을 안 하겠다면 대신 학생부장을 하라”고 말씀하셨다.


1년에 10건이 넘는 대형 학교폭력 사건이 발생하고, 쉬는 시간마다 학교 곳곳에서 역겨운 담배 냄새가 온 교정을 휘감는 학교에서 학생부장의 역할도 만만치 않았다. 3월 개학하자마자 3학년 남학생이 사소한 일로 동급생의 턱뼈를 부러뜨리는 일이 발생하면서 2년 차의 시작도 험난하게 흘러갈 것임을 예측하게 했다.


그때 마음의 안정을 위해 찾은 어떤 연수에서 한 선생님께서 보여주신 슬라이드 한 장이 내 마음을 순식간에 흔들어 놓았다.

.

‘교사와 학습자 간에 긍정적이고 허용적인 관계가 형성될 때 배움에 몰입할 가능성은 커지게 된다.’


심하게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충격이 컸다. 모든 잘못된 일은 아이들 탓이고 혁신의 변화를 거부하는 교사들 탓이라고 생각하던 내게 그 문장이 주는 울림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렇지만 이 울림 하나만으로 대충대충 남은 기간을 보내야겠다는 생각 자체가 바뀌지는 않았다.



두 번째 울림은 뜻밖의 상황에서 찾아왔다. 다들 정시에 퇴근해서 텅 빈 교무실을 벗어나 터덜터덜 주차장을 향해 가는데 어둑해진 교정에 낯선 청년들이 서성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들 손에는 몽둥이가 들려있었다. 학생부장이라는 일말의 책무성이 작동했는지 저절로 발길이 그쪽으로 향했다. 가까이서 보니 몽둥이가 아니고 쓰레기를 줍는 집게였다. 사연인즉 취업을 앞둔 동문인데 학교에 쓰레기가 너무 많아서 줍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때의 상황을 짧은 지면에 다 옮길 수는 없지만 ‘내가 이대로 우리 학교를 포기해서는 안 되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 두 번째의 울림이었다.


학교의 변화는 의외로 시간이 해결해주는 부분도 컸다. 기존에 계시던 분 중에 혁신학교 정책에 함께 할 수 없다며 한 해에 서너 명씩 떠나갔으며, 혁신학교에서 근무해 보고 싶다며 초빙으로 오시는 분들도 그만큼 되었다. 이렇게 서너 해 동안 자연스럽게 학교의 문화가 바뀌어 갔다.


늘 불안 불안했던 학교가 서서히 안정을 찾아갔다. 마침내 혁신학교 4년 차에는 교내에서 흡연하는 아이들은 한 명도 없었고, 학교폭력 실태조사에서 학교폭력 피해율은 거의 '0'에 가까울 정도로 학교는 어느새 편안한 공간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학교가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 보람도 있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같은 지역의 다른 학교들까지 돌아보지 못해 늘 아쉽고 미안했다. 초빙 4년만 버티다 가자고 생각하다가 5년 만기를 채우고도 두 해를 더 그 학교에 있었는데 지역전문가로서의 활동은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작년에 시흥으로 옮기면서는 혁신학교네트워크, 혁신교육지구 활동 등 혁신과 관련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이름을 올리고 열심히 활동을 해 보려고 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마음만큼 되지는 못했다. 올해는 작년에 못 한 부분까지 배로 열심히 하고 싶었는데 올해도 내외부적으로 별반 달라지지는 않고 있다. 그런데 지역에서 활동하다 보니 만나는 혁신활동가들이 대부분 아는 얼굴이다. 혁신교육 10년의 기간 동안 혁신학교아카데미 (지역)전문가과정을 이수한 교사들이 경기도에서 수백 명이 되는데, 지역에서 혁신교육을 위해 활동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열 손가락 다 쓰지 않고도 셀 수 있을 정도다.


특히 지역전문가로 열정적으로 참여하다가 다른 지역으로 옮기면서 홀연히 사라지는 분들이 많다. 은둔의 삶에 대한 이유는 각기 다르겠지만, 혹시 옮겨간 지역에서 그분들을 지역전문가로 활동해 줄 것에 대한 기대가 부담스러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무리 혁신교육에 오래 몸담고 활발한 외부활동을 했더라도 근무지역을 옮기는 것은 교사에게는 큰 부담이다.

제안해 보고 싶다. 지역에서 전문가과정을 이수한 분들에 대한 자료를 축적해 놓고, 전근하는 첫해만큼이라도 ‘역할에 대한 기대’보다 ‘존재로서의 가볍고 따듯한 환대’로 맞이해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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