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노란색의 체육복을 입은 고등학생들이 학교 여기저기를 뛰어다니고 있다.
난 교장이다.
아니 교감이다.
하지만 수업을 받고 있다. 음악수업.
검은 건반은 없고 오직 하얀 건반만 있는 피아노에 오른손을 올려놓고 ‘도미라도’를 연신 누른다.
‘레’도 ‘파’와 ‘솔’도 없는 건반이다.
고장 때문인지 한 번 눌러진 건반이 다시 올라오지 않아서 이번에도 실패다.
피아노 아래쪽에 발로 눌러야 하는 장치(정확한 이름은 모름)를 세게 밟지 않아서 또 실패.
연달아 건반을 눌러야 하는데 ‘도’에서 ‘라’까지 자연스럽게 넘어가지 못해서 역시 실패. 계속되는 실패에 몹시 화가 나지만 가르쳐주고 있는 사람을 생각해서 화를 내지 못한다. 난 학생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짜증이 나서 교실을 벗어나고 싶은데 그럴 용기도 없다. 피아노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데 마침 스피커에서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휴대폰 알람이다. 왜 이런 꿈을 꿨을까?
생각해보니 오늘까지 독서토론모임의 과제를 올려야 하는데 아직 완성하지 못한 압박감 때문인 듯하다.
5월 28일, 1학년 자유학년제 주제선택 시간에 김동식의 소설집 ‘밸런스 게임’ 중에서 ‘돈 나오는 버튼을 누를 것인가’를 가지고 1차시 수업을 했다. 인터넷으로 구매한 이 책이 도착하자마자 읽기 시작해 한 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소설집의 중간쯤에 있는 ‘돈 나오는 버튼’을 다 읽고 나서 더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 이걸로 하자.’
휴대폰 어플을 활용해 워드로 옮겨 수업의 흐름에 맞게 줄간격 등을 편집하여 모두 5쪽으로 만들었다.
수업의 흐름은 대략 이렇다.
1. 인쇄된 1쪽만 나눠준 뒤 각자 읽고, 활동지의 1번을 작성하기
‘1. 1쪽 글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문장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2. 인쇄된 2쪽을 나눠준 뒤 각자 읽고, 활동지의 2번을 작성하기
‘2. 김남우는 버튼을 누를 것인가? 누르지 않을 것인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3. 인쇄된 3쪽을 나눠준 뒤 각자 읽고, 활동지의 3번을 작성하기
‘3. 김남우가 마지막 문장에서 ’고개를 저었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4. 인쇄된 4쪽을 나눠준 뒤 각자 읽고, 활동지의 4번을 작성하기
‘4. 소설 마지막 쪽에 이어질 내용을 상상해서 적어 주세요.’
5. 인쇄된 5쪽을 나눠준 뒤 각자 읽고, 활동지의 5번을 작성하고 공유하기(단, 5번 질문은 학생들의 활동지에는 적혀 있지 않고, 추후 교사가 질문을 화면으로 보여주고 적게 함)
‘5. 여러분이 성인이 될 때 인성(도덕)의 가치를 소설처럼 실험을 통해 지급한다면 어떻겠는가?’
이런 흐름으로 진행하니 1시간 수업에 적당했다.
코로나19로 인해 한 줄로 앉아서인지, 자유학년제 수업이라 다른 반 아이들과 섞여서인지, 원래 말수가 적은 아이들인지, 교사가 자연스런 토론(토의)문화를 만들지 못해서인지 주제선택반 아이들은 활동지에는 열심히 적는데 적극적인 발표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번에는 활동지에 쓰게 하고 몇 명을 지명하여 어떤 생각인지 들어봤다. 아래 내용은 추후 활동지를 걷어서 적은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다.
1번에서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건 이유가 없이 당연한 거야’라는 문장을 ‘가장 인상적인 문장’으로 뽑은 아이들이 제일 많았다.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말해주지 않고 그걸 당연한 거라고 단정 짓는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어이가 없고 싫다고도 했다. ‘근데 왜?’라는 김남우의 짧은 질문도 여러 학생이 인상적인 문장으로 뽑았다.
한쪽을 읽고 활동지 1번을 채우는데 5분여 시간이 흘렀다.
다시 두 번째 쪽을 나눠주었다. 김남우가 버튼을 누를 것이라고 예상한 학생은 단 3명, 10% 정도에 그쳤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부모가 어려서부터 도덕성에 관해 계속 교육을 했고, 그 버튼으로 자신의 부모나 아는 사람이 희생될 수도 있어서 누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두 번째 쪽까지 읽고 나서 아이들은 ‘빨리 다음 쪽 주세요’라고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다음에 어떻게 될 건지 궁금해?”
“네”
평소 적막감마저 감도는 수업 분위기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반짝거림이 교실에 출렁인다.
세 번째 쪽을 나눠주었다. 받아든 학생들의 눈동자가 아주 분주하게 움직이며 순식간에 한쪽을 다 읽어 내려간다. 그런데 바로 활동지에 쓰지는 못한다. 김남우가 고개를 저은 이유를 생각하느라 본인들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3번에서 아이들이 가장 많이 쓴 단어는 ‘죄책감’이었다. 돈 때문에 사람을 죽게 만들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소설은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수업도 그랬다. 아이들은 소설에 푹 빠져 있었고, 도대체 이 소설이 어떻게 끝날까 무척 궁금해했다.
네 번째 쪽을 나눠주고 그 상상력으로 끝을 예측하게 했다. 실험을 주도한 노인이나 김남우의 부모가 죽었을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지만, 의외로 이게 ‘도덕성’을 측정하기 위한 실험일 것이라고 적은 학생들이 대다수였다. 물론 소설처럼 실험을 통해 도덕성의 가치를 금전으로 환산한 것이라고 얘기한 학생보다는, 부모가 어려서부터 강조한 것을 어긴 거에 대해 크게 실망했을 거라는 내용이 주인 게 달랐을 뿐.
활동지의 마지막 질문은 도덕 선생님의 피드백을 참고해서 만들었다.
자신이 성인이 될 때 이렇게 실험을 통해 도덕성의 가치를 판단한다면, 화가 나고 슬프거나 어이가 없을 거 같다는 의견과 도덕적인 사람에게 좋은 평가를 해주는 시스템에 대한 찬성 의견이 엇갈렸다.
과연 독서토론 모임의 과제가 아니었다면 이 책을 읽었을까? 책을 읽었다고 해도 수업으로 만들 생각까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 이 소설의 주제로 가족들과도 얘기를 해봤는데 우리 두 아들은 ‘누군가 죽는다면 금액이 얼마가 되더라도 절대 버튼을 못 누를 것’이라고 얘기했다. 누군가 죽는다는 걸 알면서 어떻게 버튼을 누를 수 있겠냐고. 내가 만약 김남우였다면?
수업에 참여한 어떤 학생의 글로 마무리를 한다.
‘지금까지 받은 교육이 인간이라 지켜야 할 가치이기에 배운 것이 아닌 그저 많은 돈을 받기 위해 그런 것이라 생각하면 허무할 거 같다. 그러다 나중엔 좀 더 버틸 것이라 생각하며 후회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