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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교단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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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미노 Aug 14. 2021

다른 문이 열린다

-유치환의 '행복'에 관한 단상

반쯤 열린 3학년 6반 교실 앞문을 열고 들어가자 학생들이 고개를 돌려 쳐다본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국어 선생님이 들어오지 않는 것에 대해 궁금함이 그 시선에 묻어난다. 교탁 위 국어 교과서를 덮고 있는 흐트러진 유인물 몇 장이 국어 선생님이 급히 교실을 나섰을 거라 대충 짐작하게 했다.     


“선생님 금방 들어오신다고 하니까 그때까지 잠깐 자습하고 있어요.”     


‘금방?’. 너무 어색해서 아무 근거도 없는 말을 뱉고 말았다. 수업을 막 시작하려던 국어 선생님이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불려 나가고, 자신들을 가르치지도 않는 선생님이 대신 들어왔는데도 아이들의 표정만 봐서는 그다지 궁금하게 여기지 않는 듯 보였다. 시선을 거둬 다시 교탁 위를 찬찬히 살펴봤다. 갱지 세 장에 각기 다른 시(詩)가 적혀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유치환의 ‘행복’이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     


‘얘들아, 너희 유치환의 ‘행복’ 배우나 보네? 이 시는 나하고 사연이 좀 있는데.’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억지로 눌러 앉혔다.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크게 관심도 없는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뻔히 그려졌기 때문이다. 잠시 내적 갈등을 겪는 동안 잊고 있었던 그녀와의 추억이 빈틈을 헤집고 스멀스멀 올라왔다.   

   

신병교육대 수료식에서 최우수상을 받아 동기들 자대로 떠나갈 때 포상 휴가를 다녀왔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 찾아뵙고, 대학 동기들 만나기에도 빠듯한 기간이었지만,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귀대하는 날 그녀를 만났다. 그런데 그녀와 헤어지고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오는 내내 뭔가 찜찜했다.

‘그녀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가?’     

지금으로 말하면 우리는 ‘썸 타는 사이’였던 것인데 군대라는 특수한 환경에 놓인 탓인지 어정쩡한 관계로 더는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아 부대 복귀하자마자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리라’로 시작하는 유치환의 ‘행복’이라는 시 전문을 적고, 한 줄 띄우고 나서 ‘나는 그래서 행복하다네. 당신을 사랑하므로’라고 적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내 마음을 표현했다고 여겨졌다.     

그녀의 답장은 한 달이 넘도록 오지 않았다. 신병이라 눈치가 보였지만 행정반에 일이 있어 들릴 때마다 혹시 편지 온 게 없는지 물어봤는데 행정반 선임들이 전해주는 편지는 없었다.

그렇다고 전화를 걸어 답장을 보냈는지 물어볼 수도 없었다. 이제는 그녀가 내 마음을 받아줄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해야 할 차례이니 답답하지만 참고 기다려보기로 했다.     


“너 혹시 편지 기다리냐?”

“네. 저한테 편지 온 거 있습니까?”

“몰라.”     


행정반 윤 병장이 얄밉게 미소를 지었다. 진짜 모르는 것이 아니라 신병을 상대로 장난을 치고 싶어서 안달이 난 표정이었다. 그렇다고 하늘처럼 까마득한 고참에게 ‘장난치지 마십쇼’라며 화를 낼 수도 없어 경례하고 문을 나서려는데 윤 병장이 다시 불러 세웠다.     


“편지 안 찾아갈 거야?”

“네? 잘 못 들었지 말입니다.”

“편지가 온 거 같기는 한데... 어딨나? 내 심부름 한 가지만 하면 그사이에 좀 찾아볼게.”     


심부름을 다녀와서도 한참 동안 애간장을 태운 뒤에야 그녀의 이름이 적힌 꽃무늬 편지 봉투를 받을 수 있었다. 곧바로 화장실로 가서 조심스레 봉투를 뜯었다. 그녀의 편지는 훈련병 시절 주고받았던 여느 편지처럼 이런저런 얘기들로 빼곡하게 앞장을 채우고 있었다. 사실 그 앞 장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대답이 없었던 것은 확실하다. 곧바로 뒷장으로 넘어갔다.

‘난 너랑 지금처럼 편한 친구 관계로 계속 남고 싶어. 그래서 네 마음을 받아줄 수가 없어. 미안해. 군 생활 건강하게 잘하고 휴가 나오면 연락해. 친구 **가.’     

그녀의 편지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 앞에 평소와는 다르게 ‘친구’를 붙여 더는 미련을 갖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듯 보였다.   


이 이후로 유치환의 ‘행복’은 내게 결코 행복하게 여겨지는 시가 아니었다. 거의 30여 년이 다 되어 다시 만난 유치환의 ‘행복’. 만약 래포가 형성된 아이들이었다면 ‘절대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보내서는 안 되는 시’라며 실패담을 재미나게 해주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을 때쯤 국어 선생님이 다시 들어오셨다.          


                                                    행복의 한쪽 문이 닫힐 때,

                                                      다른 한쪽 문은 열린다.

                                         하지만, 우리는 그 닫힌 문만 오래 바라보느라

                                             우리에게 열린 다른 문은 못 보곤 한다.

                                                              - 헬렌켈러 -     


거절하는 그녀의 편지를 받았을 때 세상 모든 문이 닫힌 듯 앞이 깜깜했다. 시간이 지나도 닫혔던 그녀의 문이 다시 열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는 아픔을 온몸으로 이겨내다 보면, 언젠가 ‘진홍빛 양귀비꽃’ 같은 애틋한 연분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행복’이라고 부른다는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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