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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교단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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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미노 Oct 07. 2021

울화(鬱火)

‘돌팔이아냐’

잠시 신호등에 멈췄을 때 호스트에게 DM을 보냈다. 

원래 계획은 한의원 진료를 마치고 집에 도착해 차분하게 줌 회의에 참여하는 것이었는데 한의원에서 예상보다 오래 있게 되면서 집에 가는 중간에 Zoom 회의가 열려버렸다. 호스트인 선생님은 “최근 자신의 마음을 다섯 글자로 적어 잼보드에 올리라”고 했다. 운전 중에 화면은 끄고 소리만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듣는 상황이라 잼보드에 내 심정을 올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부글부글 끓고 있는 마음을 도저히 누를 수가 없어서 신호에 걸려 멈췄을 때 ‘돌팔이아냐’라는 다섯 글자를 적어 보냈다.


호스트가 다른 분들이 잼보드에 올린 것을 불러주었다.     

공적행복감, 독서삼매경, 편안한연휴, 건강이최고, 마을과연대...     

젠장. ‘회복적서클’, ‘학교자치회’, ‘책읽는재미’, ‘매일글쓰기’ 등 최근 내 모습과 일상을 더 멋진 다섯 글자로 표현할 게 프라이팬 속 옥수수알이 터지듯 팝콘처럼 파파박 터져 나왔다. 하필 그걸 보냈나 후회가 되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하하하. 돌팔이아냐. 방금 어떤 선생님께서 채팅으로 보내주신 건데요. 무슨 사연인지 진짜 궁금하네요. 하하하”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언젠가부터 겨울이 아닌데도 집에서 맨발로 돌아다니면 발이 시렸다. 15층 아파트의 14층에 있는 우리 집은 폭염 때를 제외하곤 집에 가만히 있으면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래서 발이 시린 게 어쩌면 당연한 거라 여겼다. 그런데 열대야로 인해 밤에도 에어컨을 켜야 잠이 들 정도가 아니면 양말을 신고 자야만 잠이 왔다. 어느 해부터는 발만 그런 게 아니었다. 가끔 캠핑장에 가서 차가운 물이 손끝에 닿아도 그 시린 정도가 매우 심했다.     


남들은 운동을 꾸준히 하는데 왜 그러냐며 의아해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교사가 되면서부터 수영, 라켓볼, 테니스, 조기축구, 배드민턴, 자전거. 거의 쉬지 않고 운동을 해왔다. 그러기에 더 내 몸에 나타나는 증상이 이해가 안 되었다. 이 얘기를 학교 선생님들과의 모임에서 했더니 연세가 조금 더 많은 어느 선생님께서 자신이 다니는 한의원을 소개해 줬다. 차를 타고 가야 했지만, 조합원들이 일정액의 조합비를 낸 사회적 기업에서 운영하는 병원이라 믿음을 갖고 찾아갔다. 외양은 여느 한의원과 큰 차이는 없어 보였다. 다만 환자가 많지 않아서 거의 기다리지 않고 바로 진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일까.     


그날도 접수하고 곧바로 이름이 불려서 진료실로 들어갔다. 여섯 번째 진료를 받는 날이다. 

‘오늘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 증상의 원인이 무엇이고, 언제까지 치료를 받아야 하는지 반드시 물어보고 말 테야.’     

여느 때처럼 한의사는 침상에 올라가 누우라고 했다. 눕기 전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물었다.     

“원장님, 제 증상의 원인이 무엇인가요? 오늘은 말씀 좀 해주세요.”

“이제 몇 번 왔다고 그래요? 빨리 누우세요.”     

고압적인 자세는 세 번째 방문 때의 대답과 거의 같았다.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이번에는 절대 그냥 물러나지는 않겠다.     

“아니. 어디가 안 좋아서 혈액순환이 안 되는지 정도는 알려주실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그리고 다섯 번이나 왔으면 조금은 나아져야 하는데 요즘은 발이 더 시려요.”     

한의사도 당황한 듯 보였으나 답답한 내 마음과는 다르게 한의사는 전혀 설명해 줄 의향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어쩔 수 없이 침상에 누워서 침을 맞았다. 다 맞고 나서 다른 때는 바로 나갔는데 진료받는 의자에 앉았다.    

“오늘은 원인이 무엇인지, 언제까지 제가 다녀야 하는지 꼭 알아야겠습니다.”     

한참을 내 얼굴을 쳐다보던 한의사가 갑자기 책상 위 메모지에 뭔가를 적어 건넸다.

메모지는 자신의 명함이었고, 거기엔 볼펜으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아카데미. 체질교실, 수양체질’     

“이거 가서 보고 오세요.”

“오늘은 얘기를 안 해 주신다는 건가요?”

“이거 보고 오시라고요.”     

또 이렇게 옥신각신 언쟁이 오갔고 난 씩씩거리며 밖으로 나와 접수하는 분께 진료실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원장님 스타일이 원래 그래요. 다른 분들도 그것 때문에 처음에는 힘들어하시는데요. 나중에는 멀리서 찾아오시는 분들도 꽤 있어요. 답답하시겠지만, 꾹 참고 더 다녀보세요.”     


이런 사연 때문에 ‘돌팔이아냐’라고 적었다고 했더니 회의 채팅창에  ‘명의의 기운이 느껴지네요.’ ‘은둔 고수일 수 있어요.’라는 글들이 올라왔다.          

한의사가 명함에 적어주며 보라고 한 영상은 유튜브를 검색하니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두 달여에 걸쳐서 시민들을 상대로 한 강의를 녹화한 것이었다. 8체질을 하나하나 소개하는 썸네일 중에서 ‘수양체질’에 관련된 영상을 찾아 클릭했다. 1시간 40분이 넘는 영상이었다. 수양체질에 관한 설명은 10여 분 정도만 나오고 대부분 개인적인 얘기로 채워져 있었다. 외부강의를 가끔 나가는 처지에서 보면 좀 답답한 강의였지만 나중에 한의사와 어떤 대화가 이어질지 몰라 끝까지 집중해서 봤다.     


마침내 일곱 번째 진료일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침상 위로 바로 올라가라고 하지 않고, 의자에 앉으라고 했다. 10여 분간 검정 색연필로 코팅된 A4용지 위에 그림과 글자를 섞어가며 수양체질의 특징과 내가 현재 어떤 상황인지에 관해 설명했다.     


‘수양체질은 기본적으로 ‘不安定之心’이 있고, 이것으로 인해 ‘울기(鬱氣)’가 생길 수 있으며, 이 울기가 쌓이면 울화가 된다. 울화가 심해지면 심장에 이상이 생겨 부정맥이나 심근경색이 올 수 있는데 환자분은 지금 울화가 많이 쌓인 상태라 지난번에 나에게 그렇게 화를 낸 거다. 그게 하루아침에 된 게 아니고 오십여 인생에 조금씩 쌓여서 그런 것이니 당장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러면 이런 얘기를 왜 처음부터 해주지 않았느냐? 혹시 지난번에 내가 못 참고 원장님께 화를 내서 지금 그렇게 생각한 거 아니냐? 고 했더니 그런 면도 있단다.      

약 20분 정도 대화가 이어졌다. 이번에는 감정을 최대한 자제했기에 언쟁은 아니었다.     


“제가 할 얘기는 다 했어요. 계속 진료를 받으실 거면 (침상) 위로 올라가시고, 아니면 나가시면 됩니다.”          


비가 와서 차를 가지고 출근을 했다. 자전거로 올 때나 차로 올 때 도착시간은 비슷하다. 디지털 도어록을 열고 불 꺼진 교무실의 전등 스위치를 켠다. 교실 두 칸을 터서 만든 교무실의 운동장 쪽 이중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킨다. 커피메이커의 물통을 씻어 물을 채운다. 머신에 예열을 끝냈다는 불이 켜지면 거품이 살짝 덮이게 캡슐커피를 내린다. 코끝에 전해지는 커피 향을 느끼며 유튜브를 검색해 노래를 듣는다. 오늘 음악은 재즈다. 이게 하루를 시작하는 나만의 루틴이다. 오늘은 그 커피 향을 느끼며 이 글을 쓴다.     

그동안 불의나 불합리라고 생각하는 일에 버럭버럭 하거나 불쑥불쑥 솟구치는 화를 주체하기 힘들었던 이유가 수양체질 때문이었구나. 

‘자전거 타다가 자도를 가로막고 세워진 차를 마주할 때, 아무런 신호 없이 갑자기 끼어드는 자동차를 만날 때, 수업 시간에 자는 학생을 깨웠더니 눈을 부라리며 쳐다볼 때, 전혀 교육적이지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은 걸 가지고 관리자가 억지를 쓸 때 ….’


이럴 때마다 울기가 쌓였구나. 그게 울화가 되어 불쑥불쑥 치밀어 올랐다면 이제부터라도 조금씩 내 마음을 다스려보자. 50여 년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두껍게 쌓인 울화가 하루아침에 말끔히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修養)을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좀 누그러지지 않을까? 그때쯤이면 양말을 신지 않고도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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