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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교단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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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미노 Jun 26. 2022

음악은 두렵다

-  교직원동아리 '어쩌다 작가의 칠칠맞은 글쓰기'에서 쓴 글 

허기진 배를 급식으로 달래고 교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음악 소리가 들린다.

4교시 수업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밴드 공연 때문에 조금 일찍 나가도 돼요?”라고 물었던 여학생의 말이 떠올랐다.

‘아, 오늘 아이들 공연이 있었지.’

어울림 공간 앞 데크 위에는 하얀 마스크에 일회용 밴드를 붙이고 ‘밴드 이름은 대일밴드지만 우리는 일회용이 아니에요’라고 말하고 싶은 듯 신난 표정으로 공연을 하고 있었다. 

그 신나는 표정을 보면서도 ‘점심은 먹었을까?’ 걱정이 앞선다.

노랫소리를 듣고 몰려온 아이들이 한 겹 두 겹 벽을 쌓아가며 데크 가장자리로 ㄴ자 형태로 자리를 잡았다. 안 보여 까치발을 드는 아이들에게 자리를 내주다 보니 내 위치는 무대에서 점점 멀어졌다. 자리를 내준 게 아니라 애초부터 ‘내 자리는 이쯤이 적당해’라고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물러나 버렸는지도 모른다.   

  

대학교 졸업여행으로 떠난 제주도, 질보다 양으로 승부하는 횟집에서 저녁을 먹고 어느 방파제 근처에서 우리는 술을 마셨다. 마셨다기보다는 들이부었다가 더 맞을 정도였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는 빈 소주병과 찌그러진 맥주 캔이 은박 뱃속을 훤히 드러낸 과자봉지와 함께 바닷바람에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었다. 술자리에 같이한 동급생들 숫자보다 빈 소주병이 3배는 넘어갈 때쯤 우리는 2차를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개 인사불성 될 정도로 1차에서 진탕 마시고 나면 2차는 노래방, 그렇게 술이 좀 깨면 다시 술집에 들르는 전혀 새로운 거 없는 순서를 그날도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밟아본 제주도에서의 첫날밤을 여느 때처럼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뒷정리한다며 남았다가 슬쩍 무리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는데 그 낌새를 눈치챈 동기 녀석들에 의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등 떠밀려 억지로 노래방에 쑤셔 넣어졌다. 그때 먼저 와 계산대 앞 소파에 앉아 있던 M이 보였다.

“왜 안 들어가?”

M은 노래하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너도 나와 같구나.’

동기들은 그런 우리의 팔을 잡고 한창 유행하던 서태지의 노래가 문밖까지 들리는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러다 화장실 가는 척 밖으로 나와 소파에 앉아 있다가 다시 붙잡혀 들어가기를 몇 번 반복하고 나서 M과 나는 도망치듯 노래방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둘 다 제주는 처음이고, 딱히 갈 곳을 정해서 나온 것이 아니기에 찰싹찰싹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방파제를 향해 걸어갔다. 

학교도서관에 책을 빌리기 위해 들렀다가 근로장학생으로 일하고 있는 M을 만나게 되면 짧게 인사를 나누는 정도였을 뿐, 같이 전공 수업을 들으면서도 M이랑 특별한 얘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우리는 자정으로 향하는 시간의 고요를 느끼며 둑을 때리는 파도 리듬에 맞춰 대화의 끈을 이어갔다. 우리의 ‘1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후로 계속해서 날을 더해가며 만났고, 5년 후에 부부가 되었다.     


음악이 M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도 했지만 대체로 음악은 내게 두려운 존재다. 엄밀하게 말하면 음악이 아니라 ‘남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행위’를 두려워한다. 이 두려움의 시작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국민학교 음악 시간. 담임선생님이 몇 시간에 걸쳐서 리코더 연주법을 알려주고, 노래 한 곡을 끝까지 연주하는 시험을 봤다. 박자 감각도 무딘 나는 리코더에 손가락을 얹어 움직이는 게 너무나 힘들었다. 며칠을 애써도 크게 나아지지 않자 시험을 보기로 예정된 수업이 시작되기 전, 리코더를 들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학교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수업 끝 종이 울리자 교실에 들어갔다. 아무런 얘기 없이 수업에 빠진 나를 담임선생님께서는 혼내지 않으셨다. 평소 반장으로서 성실한 모습을 보였던 나였기에 “아파서 양호실에 다녀왔다”라는 말을 믿어 준 것이라 확신했다. 그런데 교사가 되고 보니 당시 담임선생님께서는 어린 제자의 뻔한 거짓말을 알면서도 그냥 넘어가 주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피하고 싶은 순간이 있으며, 그날이 그런 순간이었을 거로 생각하며.

중학교 음악 시간에는 피아노 반주에 맞춰 한 명씩 앞에 나와 노래를 부르는 가창 수업이 있었다. 그것은 성적에 들어가는 실기평가였는데 국민학교 때처럼 거짓말을 하고 양호실에 갈 수도 없었다. 만약 수업 시간에 못 하면 다른 날 방과 후에 남아야 했다. 더군다나 방과 후에는 각반에 시험을 못 본 아이들도 모두 모아서 보는 거라 알지도 못하는 다른 반 아이들 앞에서 노래하는 거는 정말 싫었다. 

피아노 반주가 시작되면 알아서 노래를 시작해야 하는데 몇 번 들어가는 타이밍을 놓쳐서 욕을 바가지로 먹은 후에 겨우 첫 소절을 부를 수 있었다. 그런데 기가 팍 꺾여서 의기소침해진 나는 온몸이 떨려 염소처럼 저절로 바이브레이션이 되었다. 순간 음악실에 있던 반 아이들이 일제히 크게 웃었는데 마치 그 소리가 꼭대기 층 3학년 교실까지 들리지 않았을까 생각될 정도였다. 이와 비슷한 창피함은 고등학교 음악 시간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래서 그때 굳게 다짐했다. ‘다시는 남들 앞에서 노래하지 않겠다.’라고. 

하지만 대학교에 입학해서도 노래를 해야 하는 상황은 매일 아침 동쪽에서 해가 뜨는 것처럼 어김없이 찾아왔다. 공부하는 시간보다 술 먹는 시간이 더 많았던 그때, 친구들은 술자리 후에 꼭 노래방을 찾아 들어갔고 놀리듯 다들 알면서도 마치 처음 노래를 시켜보는 것처럼 내게 마이크를 건넸다. 교직에 나와서도 회식 자리만 있으면 사람들은 노래방이 필수 코스였고,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사양할 수도 없었다. 노래방만 가면 마치 한 몸인 양 마이크를 잡고 있던 사람들도 한쪽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내가 눈에 들어오면 선심 쓰듯 마이크를 건네며 배려심이 많은 사람처럼 보이려고 했다. 그게 누군가에게는 몹시 곤욕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밴드부가 준비한 첫 곡이 끝나자 대기하고 있던 다른 아이들이 악기를 이어받았다. 수업 시간에 자기 손톱을 잡아 뜯어 원래 크기가 뭐였는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불안해 보이던 여학생이 다음 노래를 위해 마이크를 잡았다. 중학생 밴드부 실력은 거의 거기서 거기고, 노래하는 아이의 가창력도 그리 뛰어난 경우를 본 적이 없는데 그 아이의 목소리는 남달랐다. 전혀 움츠려 있지 않았고, 불안해 보이지 않았다. ‘저 아이에게 음악은 두려움이 아닌가 보다.’ 그렇다면, 저 아이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실패보다 실수가 더 크게 다가오는 나이,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처럼 알면서도 너그럽게 눈감아주는 어른이 주변에 있다면 손톱의 절반이 닳아지도록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마이크를 잡고 목청 높여 노래하는 그 아이를 보며 생각했다. 세상이 한순간에 리셋되어 모두가 자신을 모르는 날이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헛된 망상에서 벗어나 맘껏 꿈과 끼를 펼치는 날이 빨리 찾아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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