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것
- 교직원동아리 '어작'의 두번째 책에 쓴 글
장마와 마감, 월경이 겹치면 마음속에서 혼돈 파티가 벌어진다. 침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우울과 엉켜 있는 나를 보더니 지민이 커피와 노트북을 내밀며 말했다. “힘들지? 이럴 때, 승은이가 사랑하는 것들을 구체적으로 떠올려 보면 어때?”
- 홍승은, '관계의 말들' 중에서
장마도 마감도 월경도 아닌데 힘들었다. 힘들어서 모처럼 주어진 연휴 사흘이 더 긴 방학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짙은 흙탕물처럼 혼돈 파티가 벌어진 머릿속이, 물 냄새를 언제 맡았는지 모르게 쩍쩍 갈라져 풀 한 포기 나올 것 같지 않은 척박해진 마음이 저절로 제자리를 찾아갈 거 같았다. 그렇지만 이런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시간은 야금야금 사흘의 절반을 갉아 먹고 있었다.
이럴 때 작가에게 커피와 노트북을 건네는 지민이 있다면, 내게는 ‘너무 길지 않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엉덩이 툭툭 털며 일어서는 그날을 묵묵히 기다려주겠다’라며 말없이 손편지를 건네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적어보기로 했다. 스스로 찾아 들어간 동굴에서의 시간을 조금이나마 줄여보기 위해 ‘내가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세미나실 창문 밖까지 노랫소리가 들리도록 시끄러울 정도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흥얼흥얼하며 마른 걸레질로 아이들이 다녀간 흔적 지우기를 사랑한다. 따사로운 햇살이 사람들을 바깥으로 유인할 때 나들이 대신 집 현관 한쪽에 내 키만 한 종이상자를 펴고 자전거의 체인링, 스프라켓, 풀리에 낀 끈적끈적한 오일 닦아 내는 일을 사랑한다. 건조기에서 끄집어낸 빨래를 개키다가 발견한 건조기 전용 섬유유연시트의 잔향을 사랑한다. 졸려서 내려오는 눈꺼풀을 주체할 수 없을 때 머리맡에 20분 후에 자동으로 멈추게 해놓고 듣는 팟캐스트를 사랑한다.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때 지난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틀어놓고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부담 없이 돌아오는 밤길을 사랑한다. 어제부터 담겨 있던 물을 버리고, 새 물을 정수기에서 받아 커피머신의 버튼을 2초 동안 짧게 세 번 눌러 매일 아침 청소하는 것, 그렇게 청소가 된 머신에서 텀블러의 상당 부분을 갈색 거품으로 채운 캡슐커피가 교무실 가득 향기 내뿜는 것을 사랑한다. 여전히 맛을 모르지만, 살짝 뜨거운 커피가 식도를 거쳐 내려가는 첫 모금을 사랑한다. 갑작스러운 정전에도 필요한 것을 언제든지 더듬어 찾을 수 있도록 가지런히 정리하는 내 습관을 사랑한다. 출장 가느라 못 만나는 아이들에게‘오늘은 청소하지 않고 가도 돼. 어린이날 선물이야’라는 메모와 함께 놓은 과자를 보고‘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라고 연필로 적어놓고 간 아이들의 글씨를 사랑한다. 힘든 아이들 때문에 수업이 제대로 안 된다는 얘기를 듣고 잔뜩 긴장했는데 의외로 수업이 매끄럽게 잘 끝났던 그 날을 사랑한다. ‘오늘도 만 보 걷기 목표를 달성했다’라며 축하 메시지를 보내주는 스마트워치를 사랑한다. “아들보다 금이야 옥이야 엄마를 먼저 챙긴다”며 시기 질투하는 큰아들을 사랑한다. 어버이날을 앞두고 국어 시간에 적으라고 했다며 A4용지 한 장 넘게 사랑의 말들을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어 사진 찍어 보낸 둘째 아들을 사랑한다. 결혼하고 나서도 철이 없었는데 최근에야 철이 든 거 같다며 슬며시 내 손을 잡아주는 아내를 사랑한다. 그라운드에 수많은 사람의 손길과 정성이 들어갔을 융단 같은 푸른 잔디, 그 위를 날아다니는 하얀 공, 붉은색이나 흰색 상의에 ‘KIA TIGERS’라고 적힌 유니폼을 입고 최선을 다하며 뛰는 기아 선수들을 사랑한다.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저런 폭발력이 나올까 놀랍게 만드는 가창력과 너무나 자연스러워 캐릭터와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연기력을 지닌 그녀, 아이유를 사랑한다. 투박하고 곱씹어 읽을거리가 없는 심심한 글이지만 마음을 다해서 읽어주고 짧게라도 피드백을 잊지 않는 그대를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