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텔라 ~ 로스 아르코스 : 21.2km
길을 나서는데 오늘은 유난히 배낭이 가볍게 느껴진다.
이제 걷는 게 익숙해져서 그런가?
맏형 격인 라치가 오늘은 21km만 걷는다고 해서 그런가?
어제 물을 다 마셔버려서 물 무게가 더해지지 않아서 그런가?
걸으면서 계속 생각해 봤는데 결국 그 답은 3시간 쯤 걷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런 젠장. 숙소에 모자를 두고 온 것이다. 그 모자만큼의 무게가 배낭에서 덜어져 가벼웠던 것인가 보다.
출국하기 전 짐을 챙기고 있는데 아내가 장롱에 고이 모셔 놓았던 모자를 꺼내주며 “이거 비싼 거니까 잃어버리지 말고 가져와요.”라고 말했던 그 모자다. 그런데 햇볕 가리기에는 안성맞춤이나 스타일은 밭일 하는 아낙네 같아서 걷는 동안은 늘 가방에 넣어두고 꺼내지 않았는데 어제 짐 정리하다가 침대 기둥에 잠시 걸어놓은 것을 그만 까맣게 잊고 떠난 것이다.
그때부터 갑자기 무겁다. 배낭도 무겁고 마음도 무겁다. 산티아고에 다녀온 사람들이 ‘거기 가면 꼭 잃어버리는 것들이 있으니 잘 챙기라!’고 여러 번 강조 했었는데 하필 첫 번째로 잃어버린 게 아내가 그토록 아끼는 모자란 말인가.
아내에게 “누가 훔쳐 갔어.”라고 말할까도 생각했는데 그랬다가는 괜히 죄 없는 순례자들만 욕 먹이는 거 같아 이실직고 해야겠다. 다만 집에 도착할 때까지는 비밀로 하고.
아무튼 오늘은 ‘모자’란 녀석이 여행기를 채워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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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편 : 까미노의 친구들2
오늘은 12시 이전에 로스 아르코스Los Arcos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다 같이 장을 봐서 음식을 해 먹기로 했다. 여기에 우리 네 남자 말고 한 명의 여인이 함께 했으니 그녀가 바로 지난 번 팜플로나에서 헤어진 폴란드 친구 에디타Adyta다. 에디타는 서른 살, 파리에 있는 방사선과에서 일하는데 열 한 달을 일하고 휴가로 얻은 한 달 동안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있는 중이란다. 그리고 그녀는 채식주의자라며 점심으로 샐러드를 만들겠다고 했다.
우리는 로스 아르코스 중심가에 가서 닭고기와 파스타면, 샐러드용 채소 등을 사서 돌아와 숙소 주방에서 요리를 시작했다. 다들 점심 식사를 만드느라 뭔가를 한다. 라치는 닭고기를 양념에 절이고, 볼라쉬는 낼 아침 그들(헝가리안)이 먹을 바게트샌드위치를 만드느라 바쁘다. 프란체스코와 에디타는 파스타와 샐러드를 만들려고 물을 끓이고 채소를 다듬는다. 나만 딱히 할 일이 없다. 그래서 이쪽저쪽 쭈뼛거리다 우리가 식사할 야외테이블을 닦고 맥주와 콜라를 자판기에서 뽑아 가져다 놓았다. 그나마 장 볼 때 닭고기와 치즈 값을 내가 지불한 것이 위안이 되었다.
접시 가득한 파스타와 닭가슴살 요리, 샐러드를 정말 배부르게 먹고는 다들 포만감에 “우리 모두 씨에스타가 필요하다”며 농담을 하고는 각자 오후를 보내기로 했다.
내일도 다 같이 로그로뇨Logroño까지 가기로 했는데 당분간은 함께 할 듯싶다. 다시 만난 독수리 5남매한테 앞으로 펼쳐질 일들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