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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4일차:늑대 뛰어넘기

우테르가 ~ 에스텔라 : 29.1km

by 까미노

저녁 식사 때 나온 와인에 취했는지 침대에 잠시 누워 있는다는 게 그만 잠이 들어 버렸다. 중간에 깨니 바로 잠이 안 와서 ‘아는 와이프 11회’를 다시보기로 시청하고 잠이 들었는데 누군가 맞춰 놓은 6시 알람에 잠이 깼다. 그동안은 새벽에 깨서 잠 못 이루다가 5시 반쯤 짐을 싸서 6시쯤 나왔었는데 오늘은 시차 적응이 되었는지 6시까지 세상모르고 자버렸다.


그런데 같이 잔 알베르게 순례자들은 아무도 이 시간에 출발을 안 하는지 나 혼자 뽀시락뽀시락 소리를 내며 짐을 싸는데 여간 민폐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어제 아무런 출발 준비도 안 하고 자서 준비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이 났다.

아뿔싸. 어제 밖에 말려 놓은 신발을 안에 안 들여놓고 잠들어 버린 것이다. 저녁 먹을 때쯤 비가 온다고 해서 빨래만 급히 걷고 곧장 저녁 먹으러 가서는 까맣게 잊고 잠이 들어버렸다. 빨래 걷은 뒤로 비가 계속 왔으면 흠뻑 젖어서 물이 뚝뚝 떨어질 신발일텐데 그것을 신고 도저히 걸을 수는 없으니 오늘 걷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가슴을 졸이며 마당에 나가니 다행히 비가 금세 그쳤는지 겉만 약간 촉촉할 뿐 안쪽은 뽀송뽀송했다. 휴~~~


20180906_100146.jpg 우리는 자신의 컨디션에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함께 걸었다.


6시 30분쯤 알베르게에서 준비해준 주스와 빵을 조금 먹고 곧장 출발을 했다. 오늘은 혼자다.

‘그래. 남 따라 가느라 고생하지 말고 내 속도로 가자.’

1시간쯤 걸어서 큰 마을인 레이나Reina를 통과하는데 저 멀리 프란체스코와 헝가리 두 친구가 보인다. 어찌나 반가운지 큰 소리로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코"하며 불렀는데 정작 그는 안 쳐다보고 다른 사람들만 일제히 쳐다봐서 창피했다.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좁혀 가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며 잠시 갈등을 했다.

‘어제 그들과 함께 가는 게 힘들어서 중간에 먼저 보냈으면서 오늘 또 같이 가려고? 그러다 오늘도 못 따라가면 어쩌려고?’

‘아니야. 어제보다는 오늘 걷는 컨디션이 좋으니 오늘은 중도에 낙오되지 않고 함께 갈 수 있을 거야. 어서 그들을 불러봐.’

거리는 점점 좁혀 오는데 속에서 이런 생각들이 씨름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보다 내 입이 앞섰다.

“프란체스코”

결국 오늘도 그들과 함께 걷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은 맨 앞서 걷는 볼라쉬가 컨디션이 안 좋은지 어제보다는 눈에 띄게 더디게 걷는다. 물론 그 속도도 따라가기는 쉽지 않았다.


숙소에 도착한 뒤 우리는 광장에서 술을 시켜 놓고 함께 얘기를 나눴다. 내가 영어를 잘 못 하는 것을 아는 헝가리 친구들이 중간에 쉬운 영어 단어를 써서 통역을 해주거나 내가 대충 눈치로 때우면서 2시간 정도 얘기를 나눴는데 거기서 친구들(이틀 동안 함께 걸은 세 명의 친구들)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 몇 가지를 적으려 한다.


프란체스코Francesc

이탈리아, 45세, 미혼, 현재 노르딕스키 코치.

산티아고 순례길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길은 다 걷고 있는 중이라고 함.


라치Laci

헝가리, 47세, 기혼, 아들 둘, 엔지니어, 전직 핸드볼 선수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를 타며 ‘두 아들이 자신의 심장’이라는 멋진 말을 함. 어떤 것을 결정할 때 자연스럽게 그의 의견을 따르게 될 정도로 보스 기질이 있음.


볼라쉬Balázs

헝가리, 40세, 미혼, 라치와 25년 된 친구, 전직 핸드볼 선수, 여기 오기 전 세 개의 일을 하다가 다 내려놓고 머리 식히기 위해 옴. 자신은 종교가 없고 우주와 만물 등을 믿는다고 함. 오기 전에 라치와 두 달 동안 걷는 연습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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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늑대 뛰어넘기'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매일 늑대에게 잡혀가는 동료가 생기지 않도록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양들이 모여서 논의하며 해결해 가는 과정을 담고 있는데, 그 해결해 가는 과정이 순례길을 걷고 있는 우리와 비슷하다.

까미노에서 한 팀이 된 우리들도 대장 라치와 함께 매일 다음 숙소는 어디로 정할 것인지, 두 갈래 길이 나오면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하기 좋은 마을은 어디에 있는지, 점심을 가다가 먹을 것인지, 아니면 도착해서 장을 봐서 해먹을 것인지, 빨래는 각자 할 것인지, 함께 모아서 세탁기에 돌릴 것인지 등을 함께 의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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