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 아우성

은하수 히치하이커.

by 박하


소곤거리기에 딱 좋은 바람과 음악이었어도 커피 없이는 꽤나 묵직한 냉기였기에, 결국 물을 올렸다. 타오르는 불에 끓지 않는 물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관계여서 끓기 전의 그 몇 분이 참 좋다고. 수더분하고 넉넉한 그와 그 어떤 것도 없는 곳에서 밤을 보내는 것은 기묘했다. 영 진지해지지 않는 통에 들을 수 없던 그의 이야기는 고작이었으나 그렇다고 빈 시간을 여미려 나의 이야기를 꺼내진 않았다.


더블 캐스팅은 아니었으나 배역은 같았다. 수도도 전기도 여의치 않은 산골짜기 동네에 있는 학생들의 수를 파악한 뒤 약을 먹이고, 펜과 공책을 나누어주고. 쉽사리 갈 수 없는 곳에 떨어진 별들은 '인터스텔라'나 최근 나온 영화 '마션'까진 과장일지라도 충분히 빛났다. 차가 다니지 못하니 도로 또한 필요치 않고, 학생이 있으니 학교는 필요했겠지만 고독은 없어야 하기에 별은 가득했다.


볼리비아, 모예모예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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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익을 즈음하여 끓은 물에, 봉지에 덜어온 커피가루를 타서 건네 받아 들고 별구경을 마저 한다. 상념에서 빠져나오기 전, 아직 미처 나오지 못한 것들을 주워 담고 침낭에 눕는다. 우주 여행의 여운이 남아 의미 없는 허튼 소리를 하는데도 차마 '이제 그만 자자'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삶이 궁금하지 않았다는 말은 거짓이겠지만 애써 파고들기도 원치 않았다.




고르지 못한 땅에 뒤척이다 깬 곳은 영락없는 산기슭이었다. 산 중턱에 홀연히 놓인 흙집의 주인은 남은 담요를 내어주었으나 추위를 무찌르진 못했다. 나는 살기 위해 그와 등을 붙였다. 뒤척이다 잠을 깨었는지 내 투정을 듣고 깨었는지, 그 새벽녘의 투정마저 곱게 들어준다.


"빌어먹을, 더럽게 춥네."

"그래도 말이야, 나중에 너랑 나만 할 수 있는 이야기 아니겠냐."


무심코 던진 것은 내가 잘 살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현자가 아니었음에도 불안한 마음을 기대야 했던 나는 은근히 괜찮은 답변을 기대했었던 것 같다. 차가운 공기에 텐트 안에서마저 나는 입김은 분명, 군대에서 겪지 않았더라면 견디기 힘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볼리비아, 모예모예 (2014)


열정적이지 못한 삶은 무슨 죄인가.


그나마 가속도가 붙어 있어 이끌어 나갔던 삶이 조금 지친 기색이다. 과거에도 이런 적이 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나 스스로에게 나오는 불안으로 의심이 들 때. 가장 믿었던 나 자신이 가장 큰 배신자가 되는 순간을 나는 오래전부터 겪어왔다. 잘 알기에 반박하지 못할 구체적인 의구심은 금방 몸집이 불어 나를 짓누르다가 포기한 순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먼지를 툭툭 털어 다시 일어나 보면 '내가 약했었나.' 싶은 자괴감만 옆에 남아있으니 딱 그만큼만 버틸 수 있는 생물이 되진 않았겠지, 애써 다독이기도 했다. 세상에게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중지를 내미는 일이었고 별빛은 여전히 멀었다. 아마 십오만 광년쯤 더 가야 도착하지 않겠나. 히치하이킹을 하는 것이 더 빠를 수도 있겠다. 요금을 낼 돈은 없으니 잘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둬야겠다.


DSC02365-2.jpg 볼리비아, 트로하팜파 (2104)


고작 텐트에서 추위를 참으며 드는 생각이 이 모양이라니, 나도 글러 먹었다. 패딩 한 벌만 있으면 지나치게 행복할 것을. 내복을 챙겨와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만족을 강요하도록 하자. 고개를 살짝 들어 옆을 보니 그는 머리칼 한 올 보이지 않게 침낭으로 숨어버렸다. 잠이 들었는가, 동이 트면 걸어야 하는 걸음이 남았으니 나 역시 잠에 들어야겠다.


잘하고 있어.


그는 잠이 들지 않은 채였다. 어느덧 나는 나의 삶에서 전력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도망치는 나에게 차고 넘치는 대답이었으나, 퉁명스러운 자존심이 "나도 알아."라고 말을 뱉었다. 길에서 세운 엄지에 우주선 하나가 반응해 내 앞에 멈췄다. 아직 십오만 광년이 남았어도, 아니 사실 알고 보니 이십오만 광년이 남았더라도 오백 미터쯤은 더 가까워지지 않았나. 그 추웠던 날, 깊은 산골짜기 어느 낯선 땅에서 이루어진 성공적인 히치하이킹에 다시 별빛이 저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