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 오리 새끼

한 해의 간격.

by 박하



꼬박 십삼 개월 늦게 세상을 동생은 나와 달리 해, 지역의 우량아로 기록되었고 부모님에게 모든 사랑을 받을 있을 알았겠으나 먼저 있던 형과 지분 다툼을 해야만 했다. 동생이란 낯선 존재에 당황했던 내가 일찍 걸음마를 떼고. 남자 아이가 귀했던, 여자 아이가 가득한 친척들 사이에서 우리 둘은 독보적 존재가 되었다. 눈에 띄게 다른 설날의 세뱃돈과 추석 선물은 그야말로 차별이 판을 치는 명절이 되게 했지만 그때의 우린 타인의 불평등까지 따질 줄을 몰랐다.


동생은 언제나 나를 따라 했다. 내가 살아온 인생의 절반도 안 되는 녀석에게,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거울처럼 동생의 몫이 되고 모유까지도 몫을 남기지 않아 우유를 먹어야 했던 웃지 못할 시간이 흘렀다. 나의 장난은 동생의 장난이 되고 그로 인해 힘들어했던 엄마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나는 되도록 빨리 기특해지려 노력했던 같다. 다섯 살이 되고 또래보다 거대해진 우량아는 형을 괴롭히는 녀석들을 혼쭐 내주었고, 형을 졸졸 따라다니던 여자아이가 부러웠는지 바로 다음날부터 여자친구를 만들어 으스대기도 했다. 편으로는 정말 대단한 녀석이었다.




나는 친척들이 모인 자리가 불편했다.

친척들은 장남인 나를 챙기기 바빴고, 다른 아이 집 자식을 매번 울리는 동생을 달랜 없다. 가여운 동생을 챙겨주라고 입을 열라치면 할머니는 소리를 내며 “장남이라 역시 다르네.”라는 말로 주의를 환기시킬 , 의도치 않은 나의 득점만 계속될 뿐이었다. 이렇게 열렬한 팬이 많은 상황에, 어떤 말을 하더라도 동생은 나를재수없는 녀석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나는 이기적인 형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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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가끔 우리가 싸우면 내게 잘못을 물었다. 형이 동생을 보살펴야 한다며 하던 강요는 폭력이 되어 동생이 보는 앞에서 벽을 짚고 엉덩이를 대야만 했다. 멍이 시퍼렇게 엉덩이 때문에 의자에 앉을 때도 뒤가 시큰거렸으나, 다른 이유로 매번 울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잘못한 것은 많지 않았기에 내가 잘못한 일에는 이를 악물고 한 번도 울지 않았지만, 억울한 상황에는 이를 악물고 견뎌도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형은 형답지 않게 흔히도 울었다.


체격이 좋아 체육중학교로 진학한 동생이 폭언과 구타로 인해 운동을 관두고 심리치료를 받던 무렵, 가족과 사이가 좋지 않던 할머니는 어쩐 일로 내려와 구석방에 자리를 잡았다. 친척들이 많이 모여 곳이 없던 , 나는 할머니와 자기로 했다. 그런데 꺼진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펴고 눕자마자 할머니가 돌아누우며 말하길,


아이고 저 새끼, 코골이 때문에 잠 다 잤네.


코를 골지 않고 죽은 듯이 잔다는 가족들 말을 듣고 자라 왔으니, 말은 필시 동생에게 하는 말이었을 거다. 내가 동생인 알았던 할머니는 신경질을 한마디 뱉었겠지만, 충격은 진했다. 나에 대해 칭찬밖에 모르던 사람에게 처음 듣는 거친 말이었고 얼마나 편파적인 보살핌을 받아왔는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동생이 당한 폭력의 양은 가늠조차 되지 않았고 결국 나는 잠을 설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다시 서울로 갔다.


만일, 동생이 형이었더라면 코골이마저도 장군감이라며 칭찬받았을까. 신발을 험하게 신어 일 년마다 바꿔야 했기에 브랜드 신발은 것만 있었던, 동생이 좋은 신을 신었다면 발의 굳은살이 보다 적어지진 않았을까. 험난하기만 했을 동생의 분투가 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