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9288km
버킷리스트 중에 하나였다. 스무살 무렵 장난삼아 만든 버킷리스트 속에는 허무맹랑한 것들이 많았고, 간간이 내용을 이뤄 꽤 높은 성공률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잡은 목표들 옆 작은 글씨로 '성공'이라던가 '완료'라고 적을 때면 그것이 뭐라고 참 기뻤다. 어쨌든 이 나이 오기까지 버킷리스트를 완료하겠다는 목표는 삶의 한 부분으로서 아주 괜찮은 동력원이 된 것 같다.
해외의 신문에 나와 보겠다는 목표가 이뤄질 땐, 게스트 하우스 주인 아저씨가 매일 지역의 모든 신문을 읽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것이다. 커피를 마시며 시큰둥하게 걸어와서는 이거 너 아니야? 어, 그러네요. 인도의 축제 중 어떤 신문기자에게 찍혔는지 모를 축제 행렬의 장면에 그렇게 나는 판이 박혔다.
고도의 스파이 미션처럼 소리소문없이 나의 버킷리스트들을 꽉꽉 채우던 나날 중에 자그마한 바람들은 꼬리처럼 붙어 몸집이 불어났고, 이젠 그 리스트를 머리 속에 입력한 채 늘리지 않았다. 긴 열차를 탄 이유도 사실 그 때문이었다. 기억속에 박힌 제일 처음. 적어 둔 리스트에 있던 가장 긴 열차.
정작 현지 사람들은 그게 어떤 종류의 로망인지 모르겠다는 투로 이야기했고, 처음부터 끝까지 가는 사람들은 대개 외국인, 동양인이 대부분이었다. 언제쯤 방송됐을지 모르는 이 긴 열차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함께 시청했던 사람들이려나. 그래서 서로는 말이 없었다. 상대의 고독한 로망을 지켜주기 위하여.
부푼 꿈이지만, 아주 지루할 것이라고 했다. 한편으로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어서 이리저리 수소문하여 정보를 알아보고 일주일간의 긴 여정에 필요한 것이 무엇일지 생각해봤다. 그러나 결국 남은 것은 이런 마음이려나. 지루하면 지루한대로 타지 뭐. 먹을 건 중간에 팔지 않을까. 하는 막연함.
실제로 그랬다. 좀 더 부지런해지면 해결할 수 있는 일들과, 통하지 않는 언어로 한 두번 쯤 혼나다 보면 요령이 생긴다. 좁은 화장실에서 첫 샤워를 하며 휴지를 홀랑 적셔먹었을 때의 기분은 아, 정말 참담하군. 가령 옆에 앉은 사람이 보드카를 마시고 밤낮없이 떠들어댈 때 경찰에게 귀띔을 주는 법 같은 것. 이상하게도 그럴 때마다 그는, 꼬부라진 혀가 원래대로 돌아오고 아주 얌전한 사람이 된다.
이 마법 같은 풍경에 대하여 이야기하자면 끝이 없지만, 지루하진 않았다. 적어도 내겐. 눈이 휘날리고 한겨울에 이런 옷들을 가져오는 걸 미쳤다고 여기는 사람이 더러 있었어도. 열차가 멈추기만 하면 꾸준히 나갔다. 아주 짧은 정차시간이라 안 된다고 말리기도 하고, 한 시간 쯤 길게 서는 역에선 마트까지 걸어가 장도 봤다. 돌아오며 사진도 찍는 여유까지 부리면서.
차장과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혼이 난 다음날이었다. 어떤 사람이 기차 내에서 빌려주는 컵을 반납하지 않고 내렸기에 가져다 줬더니, 자신이 없는 사이에 마음대로 컵을 가져갔는지 오해를 한 모양새였다. 난 빌리지 않았어. 그냥 주워다 줬을 뿐이야. 어차피 통하지 않는 말에 모국어로 했어도 될텐데 당황하여 기억도 나지 않는 영어 단어를 지껄이며 뭘 그리 답답하게 설명했는지 모르겠다.
몇 번 더 언짢은 표정을 짓는 아주머니에게 퉁명스러운 대우를 받고 저 사람과 친해질거야. 머리 속 리스트를 그린다. 나는 가져가지 않았어. 어떤 사람이 버리고 간 걸 발견했다고. 화려하고 현란한 몸짓으로 그녀 앞에서 나는 일인극을 선보였다. 언어보단 역시 바디랭귀지.
어쩔 줄 몰라하던 그녀는, 미안하고 고맙다며 표정이 풀렸다. 그래도 여전히 며칠은 시큰둥한 모습이 그대로여서, 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했다. 열차가 설 때 달려나가 바깥 사진 한 장을 찍고 들어오는 것은 차장에게 눈도장을 찍는 일이 되었다. 안녕. 이 녀석 또 나왔네. 하는 표정도 익숙해졌다. 그렇게 또 과자 몇 개 사서 돌아오는 길, 열차 밑 얼어붙은 얼음을 깨고 있던 차장에게 물었다. 나랑 사진 찍을래? 다음에 제복 갖춰 입고 보드카를 들고 찍어줄게.
싫은 투였지만 이내 며칠 뒤 성공했다. 보드카가 아니라 담배를 들긴 했지만. 추운 바람부는 역사에서 짬을 내 입에 문 담배를 숨기고 가까이 붙어준 자그마한 차장 아주머니와 인사를 한다. 일주일 동안 고마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