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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2방인

이상한 나라의 이발사

그 숨막히는 도전.

by 박하


*이 글은 부득이하게 필자의 사진이 다수 포함되어있다.


아까 들렸었는데, 기억하려나. 그는 깨끗하고 광나는 갈색 구두에 장발, 더군다나 금발이었다. 색을 입힌걸까. 아니면 원래 그런걸까. 구두도 벗지 않고 소파에 누워 자고 있으니 일단 깨웠다. 아직 영업시간이 한참 남았으니. 낮엔 어떤 꼬마아이의 머리를 깎고 있었는데. 동양인의 모발은 서양인에 비해 굵고 숱이 많은 편이라 꼭 더 비싸게 부른다.


그래도 시내중심가보단 값이 반이나 저렴하다. 인테리어에만 쏟은 비용이 꽤 될 것 같은데, 외관이 이렇게 유령도시의 건물 같아서야. 두터운 옷을 벗어 걸고 안내해주는 자리에 앉는다. 누가 말했었는데, 대머리와 장발의 남자는 어떤 일을 해도 전문가스럽다. 실력과 무관하게 머리가 주는 이미지가 그렇게 강한 것은 역시 대머리와 장발임이 분명하다. 과연 이 남자는 전문가일까, 전문가스러운 것일까.



머리카락은 다시 자란다


해외에서 머리를 깎는 경험이란 아주 특별하다. 일단 그 나라의 특징을 바로 알 수 있는데다 유행하는 스타일이 무엇인지부터 고착화 된, 아주 당연한 기본 스킬까지 다를 수 있으니. 망쳐도 된다. 어차피 다시 자라는 것일 뿐. 그렇게만 말하기에 난 머리에 너무 힘을 줬다. 무서웠지, 꼭 나가기 직전에 머리를 다듬곤 했었는데. 길게 나가 있으면 내 머리의 모질이 어떤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미용을 맡겨야 하니까. 그 두려움은 파마를 했을 때 제일 강했다.


번개 맞은 듯 볶인 머리를 봤을 때 난 표정을 숨겨야 했다. 뒤에서 아주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는 흑인 아주머니를 실망시킬까봐. 어차피 망친 머리. 해보고 싶은 걸 다 해보자. 염색도 하고 탈색도 하고. 그까짓 머리는 시간이 흐르면 다시 자라는 것 아닌가.


그렇지만 괜찮다며 믿고 맡길 문제는 아니었다. 인도에서는 면도까지 함께 해주는 경우가 많다보니 아무래도 위생이 가장 염려되었고, 페루는 부모님의 앨범에서나 보던 머리를 선호했다. 뭐든지 잘 어울리는 미남이면 모르겠지만 그렇진 않으니까. 나 역시 사진 한 장 쯤 남겨야 하는데 당최 납득못할 모습이라면 얼마나 슬플까.


여자들은 차라리 기르는 것이 편하다고 했다, 묶어버리면 되기도 하고. 남자들은 대부분 투블럭을 선호했다. 깎기가 편하니까. 형, 나 머리 좀 깎아주세요. 그렇게 바리깡을 아예 지니고 다니는 친구를 만날 때면 서로 밀어주곤 했다. 땜빵이 생겼는데 모른 척 했던 적도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정말 미안.



tooth scissors


앉으라는 말에 일단 앉긴 했는데, 어떻게 잘라야 하지. 머리칼을 만져 보는 남자의 손에선 오렌지 향이 난다. 아마 오렌지를 하나 까 먹었나, 아니면 그저 향수를 뿌린 것일까. 지금 있는 나라는 러시아니까, 물론 이 남자 역시 영어를 못한다. 어차피 영어도 모르니 한국말로 해도 마찬가지일테지만 왜 나는 영어로 열심히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인가. 비슷한 스타일의 사진도 안 가져 왔는데 어떻게 해야할까. 바리깡이 보인다. 아 그래 그거.


두 손으로 공손하게 기계를 잡고 밀기 시작하는 머리를 보니 느낌이 제법 좋다. 머리를 깎을 때 입혀주는 망토 같은 것이 목에 닿아 아프지 않도록 부드러운 천까지 대 준다. 이런 상냥함이라니. 이 나라 사람들에게 머리를 깎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하물며 이런 사소한 친절이 주는 '관리'받는다는 느낌.


'이빨 가위'하면 전부 알아들어. 뭐 따로 정확한 명칭이 있는 것 같지만. 알아보긴 귀찮으니까 그냥 이후로 이빨 모양 가위라고 하면 찰떡같이 알아듣는 사람들을 만났던 것 같다. 숱가위를 도대체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는데 사전 따위에 쳐도 나오지 않았었으니까. 가위를 다 꺼내 보여달라고 한 뒤 이걸로 머리 전부를 자르는 시늉을 해봤다. 탐탁치 않은 남자의 눈빛은.




그는 다행히도 장발의 전문가였다.

소통으로 인한 몇 번의 위기와 여태 겪지 못한 생소한 스타일이 주는 위기를 겪고서 이발은 마무리 되었다. 본디 숱이 적어 숱 칠 일이 없는 대부분의 서양인들에게 낯선 커트였는지 그는 이발을 완료 후 사진을 찍자고 했다. 키가 번쩍 커 190쯤 되어 보이는 훤칠한 그는 의자 높이가 낮아 다리를 쩍 벌려 자르고, 무릎을 꿇고 자르고, 나와 아이컨택도 15센티미터가 안 되게 했다. 아, 우린 벌써 이런 사이가 되었으니 허락할 수 밖에.


구레나룻이 가로로 깎이고 의도치 않은 뱅헤어가 되긴 했어도. 어차피 머리는 다시 자라니까. 이만하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하다. 오늘 머리 괜찮네.


그래 머리는 다시 자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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