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와 소주.
네 살 전에 만난 형과는 나름대로 막역한 사이여서 금세 허물없이 굴었다. 빈 공백은 기억으로 빼곡해서 보리쌀을 구해 냄비밥을 지어먹었다는 이야기나 세상 가장 맛있었던 양고기를 구워먹었던 그 때의 시간으로 넘나들었다.
낮 술 한 잔에 그간 밀린 이야기들이 앞다투어 튀어나오고 우린 다시 한 번 포옹을 했다.
막걸리와 소주 한 병을 받았다. 짧디 짧은 여정에 편히 자보자고 했던 일이었다. 빈 배낭 가득 소주로 채우고서 먼 길을 날아 사는 사람에게 건네고선 집도 밥도, 술도 얻었다. 그리고 다시 떠날 때야 고맙다며 받은 막걸리는 불 꺼진 기차 안에서 형과 번갈아가며 들이켰다.
고작 몸 누일 곳 만큼 되는 공간 건너로 뽀얀 병이 오고가고 잘도 취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 황토빛의 나라에 몇 번이나 왔어도 해본 적 없는 일을 쉬이 하는 형의 행동에 헛웃음도 더러 나왔다. 처음엔 꽤나 유난을 떨었다. 그래도 몇 번 먼저 와 보았으니 이 나라에서 얼마나 술을 꺼리는지 설명도 했다. 나의 우려 따윈 듣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그 사람과 결국 '빨리 먹고 치우자' 합의를 봤다.
여기까지 온 일이야 그렇다쳐도 날짜마저 닮아 함께 시작하게 된 여정은 어떤 의미가 있는 듯 모양을 갖췄다. 이전에 추천해 준, 추운 한 겨울의 나라는 어땠냐며 물음을 던졌지만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서 여기로 날아왔잖냐. 널 만나려고 그랬나보다. 그래 결국 만났으니 따로 더 묻진 말아야지.
탁주는 취한 듯 취하지 않은 듯 몸에 스며 냄새도 풍기지 않은 채 날 아찔하게 만들었다. 어둠 속에서도 붉어진 형의 눈빛이 보였다. 난 헤어졌는데. 알고 보니 그 쪽도 마찬가지라 우린 또 웃고 말았다. 청승맞도록 덜컹거리는 기차에서 먼지를 안주 삼아 막걸리라니. 모르긴 몰라도 참 우스운 꼴이었을테다.
둘 다 잘 먹지도 못하는 술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어떻게 해야 소주를 가장 맛있게 마실지 따위를 고민했더랬다. 값 비싼 한식당을 가볼까, 그래도 한식당은 어쩐지 외부 음료를 들고 가기 멋쩍지 않니. 그럼 요리를 직접 해 볼까, 부엌을 쓸 수 있는 곳이 없잖니. 한국 요리를 할 줄 아는 현지인 식당은 어때, 두 시간이나 걸린다는데 어쩐다니.
노상을 하자.
나중에 따로 먹어요, 난 어차피 금방 또 떠나야 하는데. 너랑 같이 마시라고 받은건데 그럴 수 없지, 그럼 노상을 하자. 이 인간이 정말 미쳤나. 그렇게 설명을 했는데도 못 알아듣는거야, 안 된대두. 그렇지만 탄산수인지 뭔지 모를 거 아니냐고 했다. 그럼 껍데기는 뜯어, 매일 가는 단골 노점이나 한 번 가보자며 우리는 발걸음을 옮긴다. 사실 오늘 속이 좀 안 좋다는 말은 할 타이밍을 놓쳐 길을 잃었다.
에라 죽어보자 그래. 기름에 잔뜩 절어 볶인 밥에, 볶음면도 하나 시켜 마구잡이로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이런 미친 짓도 다 해보는구만. 이것도 같이 할 사람이 있어야 하는거야, 너 아니었으면 하자고도 안 했어. 치사하게도 내가 무엇에 약한지 아는 그 말에 또 기분이 마냥 좋아진다.
사실 난 막걸리와 소주가 그리웠던 건 아니라고 했다. 형이 취한 모습이 그리웠지, 한 번 또 미쳐서 춤 추는 꼴을 내 눈으로 보고 싶었다고도 했다. 그럼 노래나 불러볼까. 아니 그만둬요. 그리고 낄낄 웃고 만다. 넌 안 받아줄거라고 말하면서 다 받아준다고 했던 다른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서로 병나발을 불며 마셨다. 격을 챙길 사이가 아니라 조금쯤 묻어도 아랑곳않았다. 급하게 먹는 통에 둘 다 얼굴이 터질 듯 붉어져 우스웠다. 소주가 담긴 통이 무엇이든간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건 그제서야 깨달았다. 짙은 술 냄새에 얼굴까지 이 모양이니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모르는 척 하는 것은 아닐까 싶어 입을 닫기로 했다. 이게 무슨 꼴이야 도대체.
잔 없이 들이켠 소주는 속에서 끓어 결국 도로 나왔다. 다행히 숙소에 도착하고 난 뒤였다.
다시 만난다는 것
난 당신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됐다. 당신은 날 알고 있을까. 그렇다 말할 수 있으면 됐다. 당신에 대한 글까지 썼으니 난 당신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 하나가 온전히 내게 덤벼드는 일은 흔치 않다. 그 하나도 벅차 여러 명을 다루기 힘든 나는, 덕분에 인맥의 폭이 좁디 좁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헤어질 때 나는 인사했다. 우리 살아서 다시 만나요. 끈질기게 살아서 만나야지, 죽으면 그것도 못 해. 그러니까 죽지 말자고 했다. 이 기괴한 인사에 당황하다가도 상대는 다시 웃곤 했다. 그래 맞아, 죽으면 무슨 소용이야. 길 어딘가에서 또 만나요 우리.
그렇게 난, 매번 살아내겠다는 버팀목을 꾸준히 당신들에게 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