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방인

여행용 인간

이 어엿하지 못한 인간이여.

by 박하




진지한 태도로 그러면 뭐가 다르냐는 말을 해보기는 했다. 어차피 가벼운걸로 고를거면서. 사용해야 할 인간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내가 야속한 듯 흘겨보는 눈을 피한다. '어 이거 여행가서 쓰기 좋겠다.' 결론은 그것이었다. 항상 곁에 있는 것들을 두고도 새로운 물건을 사는 건 아니었다. 그냥 물건이 별로 없는 것이었다. 쓰기 좋겠다는 것들도 굳이 필요하진 않은 것들이니 말이다.



볼썽사납네.


늘어나는 짐을 보며 한숨을 쉰다. 어정쩡하게 체해 손을 따기에 과한, 그런 상황이 되고 만다. 모든 물건을 한가지의 구분법으로 나누기엔 그 양이 너무 많거니와 개성을 비롯한 많은 것을 잃게 된다. 그건 여행 스타일에도 같은 영향을 끼쳐서 중간이 없다. '극단적으로 경비를 줄인 여행', '효율과 반비례하는 아름다움'등이 그것이다. 이를테면 어딘가에 가서 머그컵이 예쁘다고 덜컥 살 수는 없는 노릇. 결국 배낭에 달리는 건 흔해 빠진 스테인리스 컵이다.


주변인은 죄 이런 사람 뿐이었다.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아니랄까봐. 모여서 대형마트라도 가게 된다면 쉼없이 벌어지는 일들이란 이런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은 나도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일.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가장 합리적인 물건에 점수를 매기고서도 그렇겠거니 자리를 뜬다. 우리의 지갑은 쉬이 열리지 않는다.





'저는 술을 마시지 않아서요.'


캔맥주 하나를 따서 바다를 바라보며 먹기에 내 지갑은 너무나 얇다. 얼마나 얇은고 하면 자존감 만큼이나 얇은 것이어서 더 잃을 것도 없는 상태이고만다. 그런 상태로 뻔뻔한 경주마같이 질릴대로 달리고나면 지쳐버리게 된다. 지갑에 사정에 대하여 변명을 하자니 찌질하고 구차하다. 그래서 찌질하고 구차해지는 연습을 가장 먼저 했다. 어렵지 않은 것에 놀라고 말았다.

거짓말도 더러 늘었다. 어쩌다 말 못할 사정이 있는 사람처럼 잘못을 하고 분위기를 망친다. 그 죄를 뉘우치는 역할이 되면 적당히 핑계를 대고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 정말이다. 사람이 동정받고 구차해지는 일마저 지겨워지니까. 이게 내 스타일이라고 말하려면 정말 꾸준히 그래야한다. 그것도 아는 사람에 한해서.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다시 궁상맞아지는 역할이 된다.




항상 떠나기위해 존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고 많이 듣곤 했다.

왜 나쁜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말이다. 그러나 지겹게도 늘 그랬던 것 같다. 체면 불구하고, 염치 없이 주는대로 먹고 아무데서나 자고. 몸을 혹사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여행이 고행이라면 나는 정말로 걸맞은 인간이었다. 알바가 차라리 적성에 맞았다. 직장에서 건네는 계약서가 얼마나 이상했냐하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계약서를 살펴보는 느낌이 들었다. 이력서도 마찬가지로, 이 사람은 나이가 몇, 군대 유무, 부모님의 학력은 도대체 왜? 그 이상한 이력서를 몇 번이나 사무적으로 검토하고 내보니 덜컥 붙었다.


1년은 왜 이리도 길게 느껴지는지, 다시는 짐을 싸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반년이 조금 넘어 관뒀다. 실업급여도, 경력도 쌓이지 않는 기간이었다. 그리고 그 길로 떠나버렸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 요즘엔 아르바이트 자리에서 구하는 사람도 최소 3개월 이상이다보니 그마저 연락하기 쉽지 않다. 새삼 내가 가만히 죽치고 있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좀이 쑤셔서.




아 이 어엿하지 못한 인간이여.


삶의 무게니 뭐니 하는 것들을 나는 잘 모른다. 아직 그만큼 살아보지 못했고, 무게를 제멋대로 측정하는 사람은 또 적당히 그 무게를 피하는 면이 있었다. 올곧지 못한 사람들이야 훤히 보이는 고생길을 능란하게 피해도 대부분의 사람은 곧이 곧대로 들이맞는다 생각한다. 아주 철저하게 프로그래밍된 여행용 인간인 내가 가방에 무엇을 담든 그 무게는 나의 것이니까. 고생길을 피할 순발력은 포기한 채라고.


다시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쓰라리게 다가온다. 책임감을 가질 나이 따위를 누가 정해놓긴 했지만, 흔히 거론되는 서른 따위의 분기점은 너무 이르지 않을까, 생각할 뿐이다. 그 때쯤 되어야 인생이 재밌어지기 시작할 것만 같은데. 이 역시 서른이 되어보지 않은 내가 말하기엔 우스운 일.


이젠 신분증보다 여권을 찾은 속도가, 이사라는 단어보다 짐을 싼다는 말이 익숙하다는 걸. 그리고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것. 우리의 엄마에겐 그 모습이 너무나 못마땅하겠지만. 난 그런 사람을 만나면 더 없이 좋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