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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2방인

“어쩌다 또 연락을 드리게 됐어요.”

이태리엔 ‘이태리타월’이 없으니까.

by 박하


구하기 쉬운 것들이 있다. 어려운 것들도 물론 있고. 예를 들면 한국과 일본, 미국만큼 전자제품이 싼 나라가 없다거나 차나 커피는 그 원산지들을 찾는 편이 훨씬 질도 좋고 값도 저렴하다. 시장경제가 그렇게 형성된 것이야 부정할 수 없다지만 여행 중에 꼭 필요한 물건이 생긴다면 부탁을 할 수밖에 없는 일. 수백에서 수천, 때론 수만 킬로미터를 날아온 것들을.


Mcleodganj, India.(2016)


나는 오늘도 연락을 할 수밖에 없다.

‘누나. 저기…’ 말을 듣다 말고 그녀는 말을 끊는다. 누나 동생 사이엔 그런 거 없어. 그냥 받는 거야. 대신 나중에 내가 부탁하더라도 최선을 다해주면 돼. 그걸로 됐어.


불만족스럽게도 또 이런 식이다. 문제는 누구나 다 이런 식이라는 것.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이 날 보며 느끼는 것들이 동정인지, 대리만족인지, 비웃음인지 알 길이 없다. 나보다 때론 귀해 더 필요한 물건들을.




줄려면 그냥 줘, 돌려받을 생각 없이.


아니면 아예 줄 생각도 말아. 어릴 적부터 수 없이 들었던 아버지의 지론이었다. 그러나 난 욕심쟁이였다. 사탕 두 개를 들고서 하나를 줄까 말까 고민하는 차에 친구들의 치사한 녀석이라는 낙인이 불현듯 날아와 찍힌다. ‘아 이런 말이었나.’ 문득 깨달을 무렵, 나는 사탕 대신 지갑에 현금과 카드를 들고 다니는 나이가 되었다. 버스비, 과자값 따위를 위해 나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친구들. 정말 긴급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꽤 큰 돈을 빌려달라는 사람들까지.


우습게도 아버지의 지론이 스며든 이후, 여러 가지 경험에 덧붙여진 생각은 이랬다. 줄려면 그냥 준다. 돌려받을 생각 없이. 그러나 내가 누군가에게 받았다면, 그 은혜는 반드시 갚는 게 더 낫다는 걸.


Mcleodganj. India.(2016)


지구 반대편 파라과이까지 가져와 준 이어폰이나, 우연찮게 내가 지금 있는 곳과 본인의 여행지가 맞아떨어져 포르투갈까지 들고 와 준 때밀이용 이태리타월. 히말라야 앞 섶까지 배달해준 책 한 권.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누군가에게 부탁할 때마다 항상 들었던 말들도.


‘됐어, 괜찮아.’




급할 때 생각나는 것들이 많다. 칼에 베이거나 어딘가에 찍힌 상처엔 역시 마데카솔, 후시딘. 소독할 땐 빨간약이, 속이 더부룩할 땐 가스활명수, 몸이 아파 꼼짝도 할 수 없을 때 생각나는 라면 한 그릇과 카메라의 화각이 아쉬울 때 떠오르는 셀카봉. 어느 시골집에서 한국요리를 해준답시고 설칠 때 딱 아쉬운 참기름 한 스푼.

심각할 때도, 고작일 때도 생각나는 물건들. 난 너무나 익숙해져서 그럴 때마다 몸서리가 쳐지는 건, 그것들을 털어내려 하는 걸지도 모른다. 정말 너무 추운 곳에서 핫팩이 딱 생각이 나 버리는 것도 그 물건을 알기 때문이라는 걸. 차라리 몰랐다면 생강차를 미리 한 잔 마셔두거나 독한 보드카를 작은 병으로 준비해 놓을 걸 싶은 것도. 결국 내가 겪어봐야 알게 된다. 대체품은 언제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여기 사는 사람들이라고 춥지 않은 건, 다치지 않는 건 아니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은 물건을 부탁할 땐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 결국 메시지를 적는 내가 여기 있다.


Mcleodganj, India.(2016)


국제 택배기사가 된 느낌을 받아본 적이 있다면, 아마 당신은 택배기사가 아니라 그 사람에게 구원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주면 어떨까. 물건이 꽤 무거우면 비행기가 무거워질 뿐이니 걱정 없이 담으면 된다. 와 정말 얼마나 필요하면 이럴까 하며.


내 가방엔 상당한 양의 실뭉치가 있다. 여기밖에 구할 수 없는 팔찌용 실뭉치들을 한국에 역으로 배달해주기로 한 부탁에. 인도의 시골 마을에서 갑작스레 탈이 나 며칠을 뒹굴던 날, 살려준 은혜를 드디어 갚을 길이 왔구나. 나는 즐겁게 배낭의 무게를 늘린다.


이쯤 되면 이미 눈치챘겠지. 누군가에게 또다시 부탁을 하려니 부끄러워 쓰는 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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