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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2방인

Buen Camino!

산티아고 가는 길.

by 박하


버킷리스트가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큰 축이 될 만큼 영향력이 세지다 보니, 사실 주객전도가 된 건 아닌가 싶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니 이야기를 만들러, 특별한 경험이랍시고 둘러댈 곳이 하필이면 산티아고였는지. 이런 불순한 마음으로 가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죄의식마저 오른다. 이제 슬슬 가볼까? 하는 너무나 깃털 같은 무게로 길 위에 선다.





어정쩡한 다짐은 하루 만에 날 후회로 인도했다. 왜 스스로가 사서 이 고생을 하는 걸까. 출발지인 대성당 앞에서 당당한 표정으로, 또 가끔은 우렁차게 자기들만의 다짐을 외치며 기운차게 발걸음을 딛는 사람들과 확연히 다른 나였다. 발목은 괜찮은가, 배낭끈은 충분히 몸을 조이고 있나 스스로 점검하며 걷기를 시작했다. 억지로 질질 끌려가는 모양새였으니 사진을 찍었으면 분명히 웃겼을 테다.


익숙하지 않은 것들 덕에 나는 화살표만 좇았다. 도시가 작아지고 건물이 사라지니 나타난 건 들과 강이었지만 어느 낯선 것을 믿는다는 일은 정말 거대한 불안과 함께였다. 이 길이 옳은 길인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잘 보이지 않는 화살표에 갈림길까지 나타날 때면 길에서 버둥거렸다. 아직은 믿음직한 인터넷을 따르기로 했다. 그렇게 막다른 길을 향해 3킬로미터를 꼬박 걷고서, 난 잠시 주저앉아버렸다.



화살표 찾기를 관두니 하늘을 찢는 비행기, 흔들리는 꽃이 눈에 들어왔다. 난 얼마나 많은 걸 놓치고 있었는지, 세기가 가늠되지 않는 햇살이 날 태우고 바람은 목덜미를 타고 가슴께로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지나 불었다. 길은 다시금 내게 말을 건넨다. 조금 돌아가도 괜찮다. 충분히 다시 돌아갈 수 있다.


밤만 되면 몸이 열병처럼 끓어 침낭을 걷어차고 만다. 다리부터 타는 듯 오르는 뜨끈함에, 열을 식혀주는 약을 잔뜩 발라놓고도 멎지 않아 그러고 마는 것이다. 고생하고 있다고 알려주는 걸까. 그래 참 고생이 많구나. 대신 어르고 달래줄 누군가도 없이 홀로 비틀대는 몸뚱이를 다독인다.


나도 화살표만 따라 걸었으면 좋겠다.


새벽부터 화살표만 따라 내내 걷고 있다고, 푸념을 했다. 밥장사를 하는 누나가 때때로 식당 메뉴사진을 올리는데 마침 배가 고파 그랬다. 담배를 한 대 꺼내어 커피와 따끈한 빵을 시키는 다른 순례자들을 보며 꿀꺽, 침을 삼킨 직후라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걸 외면하며 지나쳐야 했던 스스로가 유리에 비쳐 그랬던 건.


누나는 마련된 이정표만 따라 걷는 일이 부럽다고 했다. 모퉁이든 갈림길이든 만나는 벽벽마다 가야 할 방향이 있으니 얼마나 괜찮냐고. 그 말은 다시 생각해봐도 내내 가슴에 박혀, 실은 내가 참 쉬운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게 했다. 무엇 때문에 이 길에 왔는지, 새벽부터 뻐근한 발을 이끌며 일어나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걷는 일인지. 큰 종교적 무게를 지닌 것도 아니면서.


타인의 열정을 이유 삼아 나의 열정에 불을 붙이는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 불씨는 캠프파이어에서 타닥거리며 튀는 것과 같아서 옷 몇 벌 그을리겠지만 불이 붙진 못하듯이, 잠시 뿐이라고. 가스가 떨어진 라이터처럼 타닥거릴 뿐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손가락을 돌려보는 사람들이 있다, 아주 가끔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버스를 탄다면, 기차를 탄다면, 심지어 자전거를 탄다면. 지나가는 모든 것들을 부러워하며 나의 다리를 끊임없이 움직이며. 길이 먼저 닳느냐 내가 먼저 닳느냐. 묻는 듯했다. 가끔 건네받는 응원과 옳지 않은 길을 걸을 때 그 길을 고쳐주는 수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을 믿어 안전을 기원해주는 그 말 한마디는 밥보다 배가 불렀다.


이내 산티아고라는 곳에 도착하여 개인의 성취 같은 것을 이루면, 내 눈에선 눈물이 흐를까. 신은 나의 죄를 모두 사해줄 것인가. 이렇게 걸어 여태 지은 죄가 모두 용서된다면 사람은 얼마나 제 멋대로 인 것인가. 하필 난 내 가슴속에 이런 소망을 새겨서 몸을 고생시키는지, 마무리가 돼서야 알리라고.





이 길이 맞는 거야? 우리가 잘 따라가고 있는지 모르겠어.

한 쌍의 부부가 내게 물었다.


화살표가 보이지 않으면 보일 때까지 걸어, 스스로를 좀 더 믿어도 돼.

산티아고까지 사흘이 남은 날, 새카맣게 그을린 나는 그런 말을 할 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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