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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Jun 30. 2017

백 년 전의 이벤트

영화 <박열>


*본문은 주관적인 견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극의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온갖 것들이 덤비는데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들을 건드리지 않은 채 말하고자 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영화는 성공한다. 여태껏 이준익이라는 사람의 행보에서 그리 큰 반향을 일으킨 작품은 없다. '없다.'고 단언하면 고개를 갸우뚱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상업적으로서의 성공을 차치하고 기억에 남는 영화를 만들었다고는 보기 어렵기에.


이번 <박열>을 보고 모호했던 감정의 이유도 마찬가지. 박열이란 캐릭터는 끝내준다.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한 멋진 과거의 그를 끄집어냈으니 '이준익에게 박수 짝짝-.' 그 대신 내린 결론은 그렇다. '정말 박열이란 사람은 끝내준다.' 물론 그런 의도와 사명감을 가지고 만들었다면 감독은 목적을 달성했을 정도로.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실존 인물과 실제 사건을 가지고 이야기 할 때 범하는 오류는 수없이 많다. 이미 이전에 쓰인 영화 <재심>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었던 기억이 있다. 이제는 흔히 쓰이는 그 문장 이후에 스크린에 띄워진 문장은 하나 더 있었다. '철저한 고증을 했습니다.' 물론 과거의 대사 하나하나까지 따 올 수는 없겠으나, 이 문장이 가지는 신뢰는 컸다. 그러나 부작용으로 생기는 복잡미묘한 감정은 마치 '원조 맛집'이라 떠벌리는 격이라고나 할까.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는 영화들 중 으뜸이라고 말하고 싶은 그 모습에 실소가 나오고 말았다.




세상의 진실에 깊이 들어가면 일찍 죽는다네.


박열이 재판을 받기 전, 일본인이면서 진실을 위해 싸우는 변호사 후세 다츠지가 한 말이다. 이제부터 그 깊은 진실에 들어가야만 하는데 박열은 터무니 없이 유쾌하게 상황을 풀어만 간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듯, 잃을 게 없는 실존주의적 삶이 주는 그 힘.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쓰여진 시점은 1905년. 당시 일본 사람들이 열광한 그 허무주의적 풍자소설을 박열 역시 읽었을 것이다. 관동지방에서 인력거를 끌며 사는 박열은 암암리에 청년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을 위한 활동을 한다. 3.1운동이 끝나고 난 시점의 박열이 청년지에 쓴 '개새끼'라는 시는 당신들에게 허무주의가 가당키나 하냐는 듯 거친 내용이다. 시를 보고 반한 후미코는 그에게 단숨에 동거를 제안한다.



무정부주의자

레지스탕스라는 단어까지 어울리는 그 기백은 어딘가 유쾌하고 통쾌하다. 어설프게 시비를 거는 사무라이들에게 뜨거운 오뎅국물을 부어버리고 큼직한 식칼을 휘두르는 막무가내의 행동이 용납되는 건, 한국의 역사에서 비롯되어 기본적으로 생기는 '일제'의 대한 반감이다. 당시 어려운 단어였을 아나키스트를 사용하며 무정부주의에 대한 꿈을 키우던 그들은 거창한 포부와 달리 소박한 활동을 한다. 독립자금을 빼돌린 사람을 길에서 잡아 구타하고 폭탄을 만드는 데 실패하고. 돈도 없고 인원도 많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크게 한 탕 해보자 생각할 수 있는 딱 그 정도의 상태에서 미적지근히 살고만 있었다.



관동 대지진

'조선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일본인에게 반감이 있습니다.' 박열을 심문하던 다테마스는 그렇게 말한다. 관동 대지진이 일어난 후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일본 정부가 한 선택은 조선인들에게 잘못을 돌리는 일이었다. 그 선택에 대하여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던 정부가 본보기로 삼아야 했던 조선인이 하필 박열, 그였다.





조선의 자존심

중국에서 몰래 폭탄을 들여오고 일본 황태자를 암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된 박열은 당당하다. 스물 둘은 '젊은'보다 '어린'이란 형용사가 어울리는 나이여서 그가 가진 패기가 어디에서 근거했는지 묻게 한다. 그러나 그의 머리는 비상했고, 공론화와 더불어 이슈가 될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알았다. 당장 일본에게 필요한 명분을 쥐고서 내어주지 않은 것은 분명 자존심이었다. 그것도 잃을 것 없는 자들이 부릴 수 있는 날 선 자존심 말이다.



감당할 수 있겠어?


꼼수의 대가인 미즈노렌타로는 박열이 원하는 사형을 순순히 내어주지 않는다. 도리어 거짓으로부터 꾸준하고 치밀하게 쌓는 오류들을 감당할 수 있겠냐는 박열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사라질 뿐. 그 모습은 꼬박 백 년이 지난 사람들에게 불씨를 일으킬 후폭풍이 되리라 생각지 못한 모양새였다.



하고 싶은대로

따지고 보면 박열은 하고 싶은대로 다 했다. 변호사를 불러달라고도 했고, 젖가슴에 손을 얹은 결혼 사진도 찍고, 재판 거부를 손에 쥔 채 법정에서 조선 관복까지 입었다. 그런 조건들 말고도 투옥 중 요청한 것이 서신을 전해달라는 일과 밥을 더 달라는 일 뿐이었으니, 박열이 순간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거기서 비롯되는 깨달음은 그의 본질과 얽혀있다. 과연, 우린 그만큼 치열하게 살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 바로 그것.




백 년 전의 이벤트​

일본영화로 착각할 만큼 일본어로 대사를 하고 자막을 깔아놓는 일이 제작자로서 얼마나 힘든 선택이었을지 불 보듯 뻔하다. 진실에 더 크게 닿을 수 있는 일이라고 선택을 한 것일까. 일본 사람이 봤을 때 알 수 있는 진실이 되길 바라진 않았을까. 영화를 다 보고 감독에게 아낌없이 박수를 보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부분이다.


1919년의 그 날처럼, 이 영화를 볼 당신은 박열이 만들어놓은 이벤트를 기꺼이 즐거워했으면 한다. 우린 이 긴 시간동안 치열해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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