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높고 좁던 세상.
칠이 벗겨진 검붉은 외제차에 기름을 채우던 날을 기억한다. 돈의 단위를 구멍가게의 캐릭터 빵으로 밖에 셀 수 없던 나이여서 차 한 대의 값이 오백만 원이라는 삼촌의 말에 입을 있는 대로 벌렸다. 그때의 나에겐 세상만 한 돈이었다. 주유소의 석유 냄새는 기억과 함께 짙게 박혔다. 외국에서 온 자동차라 그런지 기름을 많이도 먹었고, 또 그만큼 자주 기름을 채우러 가야 했던 걸 기억한다. 사실 낡은 자동차가 기름을 얼마나 비효율적으로 사용하는지. 더불어 연비라는 단어의 뜻도 알게 되었을 나이가 되었을 땐 시동도 잘 걸리지 않고 매연을 요란하게 뿜던 자동차를 까맣게 잊었다.
카자흐스탄이라 했다. 공사 현장에서 흔히 보이는 길쭉한 크레인 위에서 하루를 보내는 게 일이었던 삼촌은 어느 날 불현듯 떠났다. 내가 조각들로만 남지 않게 추억을 기억하는 방법을 익히고 난 뒤에야 삼촌은 매연만큼 까맣게 타서 돌아왔다. 한껏 자랑하며 코조차 스스로 못 닦던 나를 조수석에 태웠다. 호기심이 발동해 크레인에 오르면 얼마나 무서운지 물었다. 온종일 똥도 못 싸고 오줌도 마음대로 못 싸. 너랑 동생이 쓰는 방보다도 좁은 곳에서 내내 혼자 있어야 해. 바람이 세차게 불 때보다 무서운 건 그런 거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거. 이를테면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친척들 사이에서 돈을 많이 번다는 말이나 몰고 다니던 그 좋은 자동차는 사실 내게 어떤 소용도 없었다. 그런 말이 우습게 캐릭터 빵 하나를 쉬이 사주지 않던 삼촌이 야속할 뿐이었으니까. 좀체 익숙해지지 않는 이상한 이름의 나라에서 싸게 가져왔다던 자동차가 당시에 얼마나 값비쌌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기름을 이렇게 줄줄 흘리는 자동차가 왜 고급차인지 깨닫게 된 스스로가 얼마나 안타까운지는 알게 되었다.
어려운 키릴 문자는 여전히 읽지 못한다. 스탑오버를 해야 하는 도시가 카자흐스탄에 붙은 어디라고만 들었을 때 고개를 갸웃하니 직원은 수도라고 했다. 그렇게 말해도 역시 알 리가 없다. 그저 어딘가 여전히 생경한 나라의 이름을 듣고서 최초이자 마지막인 기억을 불러왔을 뿐이었다. 이런 식으로 가게 될 줄 몰랐으니까.
사람이 휑한 공항을 지나 도심으로 향하는 버스를 탄다. 지도에 적힌 호스텔의 목적지를 보여주고 표를 받는다. 신호를 기다리며 건넛 버스에 탄 아이가 손을 흔든다. 너와 나는 참 닮았다 생각한 건 나의 착각이었는지 동방의 얼굴을 지닌 네가 날 보고 엄마에게 알린다. 지도를 보고 헤매는 외국인의 손을 잡아 건물 앞까지 데려다 놓는다. 친절하지 않아 표식도 없는 호스텔의 층수를 고민할 때 마침 내려온 할머니가 뭐라고 읊는다. 러시아 여행 중 그나마 숫자를 외웠던 것이 다행이라 생각한다. 문을 열고 미소를 살짝 지으며 여권을 내밀었다.
통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의 힘이 제법 강했는지 언어를 빼고 하루를 보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무뚝뚝한 듯 다정한 사람들의 부축을 받은 날이었고 덕분에 마음은 어디에도 애쓸 필요 없이 편히 쉬었다. 고양이를 약 올리다 손을 긁혔고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날 본체만체하던 숙박객들은 과자를 많이 샀다며 툭. 커피를 너무 많이 따랐다며 툭. 어쩐지 토라져 보였을 이국의 여행자를 챙긴다. 햇살이 너무나 강한 노을을 맞는다. 낡고 검붉은 BMW를 거리에서 봤다.
그 후 삼촌의 차는 작은 경차로 바뀌어 있었다. 썩 경기가 좋지 않은 탓이었으리라 짐작할 뿐 어디에도 기름 많이 먹던 외제차의 흔적은 없었다. 공사현장에서 작업 중에 얼굴을 부딪혀 이를 잔뜩 새로 했다고 어른들끼리 속닥대는 소리를 흘려들었다. 어쩌면 그 자동차가 몸의 어떤 부분으로 바뀌었으리라는 생각을 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이따금 그는, 아니 꼭 한 번 더 중동의 햇살을 이야기했다. 이글거리는 태양과 까무잡잡한 피부. 그 속에서 함께 빛나던 삶의 전성기를 회상하고 있었다. 먼 옛날에 이야기했던 중동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카자흐스탄이 들어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눈을 반짝이며 뱉는 추억을 중동이 아닌 다른 곳으로 옮길 자신이 없었다. 이제 그 나라의 이름은 잊은 듯 연신 중동을 말했다.
누군가의 인생을 지낼 수 있도록 버팀목이 되어준 땅은 여전히 강한 햇살에 얼굴을 찡그릴 수밖에 없다고 말해줘야겠다. 그 언젠가 중동의 어느 나라에서 열심히 건물을 세웠을 당신의 삶이 머물던 날을 엿보고 왔다고 말해야겠다. 그렇게 잘 벌던 시절에 맛있는 거라도 잔뜩 사줬으면 어땠겠냐고 더러는 얇은 투정도 해야겠다.
그는 이제 크레인에 오르지 않는다. 사무실에서 넥타이를 매고 돈을 벌며 차도 꽤 넓은 것으로 장만했다. 마치 까무잡잡한 적이 없던 듯 흰 피부로 돌아왔고 더 이상 자신의 황금기를 떠들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마지막으로 그가 말하던 날을 기억하니 투정은 도로 없던 일로 해야지 싶다.
한밤중에 다른 어른들과 술에 취했고 잘 풀리지 않는 요즘의 근황을 말하다가 그렇게 옛날을 꺼내야만 했을 때, 체면을 차리기 위한 왕년을 이야기하다 말고 그는 집 밖으로 나갔다. 길 건너 있는 매장의 두툼한 봉지를 들고 돌아와 건네니 깊은 언저리에 있던 어린 내가 녹아내린 탓이었다.
나는 여전히 중동을 기억한다.
한창 자랄 때 많이 먹어야 한다며 가장 큰 햄버거를 두 개나 사온 어두운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