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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Sep 26. 2017

헬로 스트레인저

기억 너머 여행이라는 이름.


해가 누웠고 시내를 걸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햇살을 따라 걷는 일은 유난히 심심해서 이어폰으로 귀를 막아야만 했다. 어깨를 덥석 잡히는 느낌에 놀라기보다 움찔하지 않았을까. 키가 멀찍이 크고 눈이 움푹 파여 파란빛을 띠는 사내는 나를 안다고 했다. 소곤소곤 마약 팔이를 일삼는 사람 중 하나라는 생각 외에 다른 것이 들지 않았다.


누군데 나를 안다고 말하는 걸까.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아도 기억 속 떠오르는 구석이 없었다. 사내가 너와 나를 우리라 하여 자신에게만 있는 기억을 끄집어낼 때 나는 당혹스러웠다. 당신을 알지 못한다고 하면 마치 큰일이 날 것처럼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다른 정황은 들어맞았다. 지난 삼 월에 있던 모로코에서 있던 나를, 그중 함께 있던 하나의 도시를 점찍으며 우린 잠시 잠깐 스쳐 지나갔었다고. 그러나 그런 기억은 어디에서나 있고 어디에서도 없으니 나는 더욱이 황당할 수밖에. 포르투갈의 해안 도시에서 갈매기 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재회라는 걸 했다. 솔직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말했어야 하는데 그의 반가움이 분에 넘쳐 페이스북 아이디를 건넸다.


잠시 뒤, 나는 기억이 나는 듯 연기했다. 아마 어디선가 스쳐 지났을 나를 기억해 주는 것에 대한 예의였다. 교환학생이 되어 머문다는 사내를 좁은 도시에 하염없이 걷다 보면 종종 만날 터였다. 머무는 동안 밥을 먹자며 멀어진 그가 연락을 해온 것은 같은 날 저녁이었다. 연고 없는 도시에 약속 따윈 있을 리 만무함에도 나는 사내를 만날 용기가 나지 않아 선약이 있다며 둘러댔다.


사내에 대한 정보는 아주 미약했다. 한 음절을 내는 이름과 독일인이라는 것, 턱수염이 진하고 안경을 쓴 점. 도대체 어디서 만났던 걸까. 지난 여정을 천천히 되감기 해 본다. 그가 만남의 순간을 조목조목 나열할 때 나는 그 수만큼 작아졌다. 죄책감이 밀려오는 일들에 대해 가만 생각해야만 했다. 아는 체를 하지 말고 끝끝내 잡아뗐다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고백했더라면. 그러나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사내는 정확히 나를 알아보았다. 나는 지난 삼 월까지 탈색한 흰머리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억은 때로 명료하다. 나쁜 기억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 왜곡하는 성질이 있어도 그마저 나의 것이니까. 모든 기억을 메모하기에 사람의 뇌 용량이 충분하다는 사실이나 단기 기억과 장기 기억의 차이 따위는 알지 못해도 좋다. 그저 애석하지만 보관하고 싶은 기억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 없다는 것. 그럼에도 다행인 점은 우리에게 망각이란 녀석이 있다는 정도가 아닐는지. 때문에 머릿속을 표류하여 살아남은 것들은 애착이 간다. 하물며 사람으로부터 생기는 기억이라고 다를까.


자리를 빠져나오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를 기억하지 못해 애달픈 감정을 해석하느라 시간이 들었다. 연기가 어설픈 탓에, 피하고 싶어 하는 낌새를 알아차렸을지 모르겠다. 여행 중에 만난 인연에게 남는 기억의 절반은 함께 고생한 역사가 대부분이라 스스로가 못내 부끄러웠다. 잘 안다. 자신의 역경을 증명할 사람에게 베푸는 반가움에서 나는 냄새는 딱 그랬다.



애써 며칠을 잊고 지냈다. 아침에 산책을 하고 해가 높게 뜨면 낮잠을 자다가 누울 때 도로 나와 걸었다. ‘언젠가’라는 단어를 마지막으로 끊긴 메시지 창에 커서가 심장처럼 뛰었다. 한 사람에게 몹쓸 짓을 한 것 같은 마음이 함께 뛰었다. 마지막으로 남긴 단어의 가벼움이 너무나도 꼴 보기 싫어 화면을 덮어버렸다. 그토록 싫어하던 기약 없는 약속을 방패로 썼다.


도로 용기를 내어 연락을 해보려 한다. 번화가에서 확실하지 않은 얼굴을 향해 우렁차게 부르던 사내의 용기만큼은 돌려줘야 하지 않을까. 그 낯선 인연을 부둥켜안을 동기가 그에게 남았던 것은 내가 어떤 말이라도 그에게 건넸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고맙다는 말을 해야지. 어느 부분에서 내가 선명하게 남았는지 물어봐야겠다. 어쨌든 시간을 건너 만난 우리가 아닌가. 낯선 당신을 새로 알게 된다한들 또 어떤가.


글을 맺으며 나는 그와의 인연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우리는 분명 만났었다.



*영화 <Closer>의 도입부 대사에서 제목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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