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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Oct 05. 2017

일터를 떠나며

누군가의 마지막으로부터.


한 숙소에 오래 머물다 보면 모르긴 몰라도
직원 한 사람 정도와는 친해집니다.

기계 같은 미소만 지을 수 없는 게 사람이니까요.

우린 누군가에게 홀로 아팠다 말하더라도
곁에 사람 하나쯤 있었다는 것을 잘 알지요.

-어느 여행자의 일기




그녀는 코가 유난히 부리부리했다. 아주 짧게 자른 머리에 어쩐지 덤덤한 슬픔이 스치는 것은 배우 에드리언 브로디의 표정과 같았다. 그녀는 자주 담배를 태웠고 테라스가 있지만 실내는 금연인 탓에 호스텔 입구로 가서는 종종 쪼그려 앉았다. 그녀는 들어오는 나와 마주칠 때면 꼭 담뱃재를 한 번 털어내고 인사를 건넸다. Hola.


풍기는 분위기에서 이미 짐작했지만 그녀는 스페인 사람이었다. 포르투갈에 와서 일하는 이유를 물을 필요는 없었기에 말을 아꼈다. 한낮의 햇살은 강했고 그녀는 숙박객을 위해 마련된 라운지 소파에 누워 낮잠을 자는 게 일과였다. 백여 명도 넘게 머물 듯 큰 호스텔의 고객은 낮이면 남김없이 나갔다.


나는 그중에도 나가지 않고 노트북을 두드리는 유일한 손님이었지만 그녀는 이틀쯤 나를 눈치 보며 신경 쓰곤 이내 다시 소파에 누웠다. 그리고 하던 대로 잠을 청했다. 물론 나 역시 그런 시간은 해가 높을 때뿐이었으니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중저가의 호스텔에는 장기로 체류하는 사람이 더러 있었고 알음알음하여 몰래 제공되는 서비스가 있었는데 얼마 간의 돈을 지불하면 간단한 저녁을 만들어 주는 것이 그중 하나였다. 이것저것 넣은 파스타, 한 잔도 되지 않는 와인, 발사믹 따위에 적당히 버무린 채소. 어떤 날은 양배추와 달걀에 볶은밥도 있었다. 그저 재료비의 얼만큼만 더 지불하면 될 일이었는데 하필 은행에 문제가 생겨 그마저도 부담이었다. 그녀는 그 일을 도맡는 사람이었다.


또 어느 날은 주방에 마련된 세탁기를 써보고자 기웃대고 있었다. 두 벌 밖에 없는 옷을 세탁하는데 돈을 내야 한다면 함께 돌릴 사람 하나쯤 있지 않겠느냐 생각하던 차였다. 오로지 기름에 버무린 파스타를 점심이랍시고 접시에 담던 그녀는 나에게 다가와 이용 방법을 세세하게 알려주었다. 설명을 듣고 난 뒤 조심스레 고민했던 건 결국 금액이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그녀의 웃음을 보았다. 그냥 써도 돼.


보통의 그녀는 여전히 퉁명스러웠고 밤이 질 때까지 소파에 앉아있는 나는 그녀의 깊은 주름을 자주 챙겨보았다. 매일 티셔츠와 속옷 양말 하나씩을 넣고 돌리기 아쉬울 때 그녀가 가져온 빨랫감에 신세를 졌다. 어쩌면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을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 무렵의 어느 날 갑자기 그녀는 사라졌다.





부부가 함께 울던 날이 분명 아버지가 회사에서 잘린 날이었을 것이다. 일터에 정든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당신이 이제 더는 할 일이 없다’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직장생활을 깊이 한 적 없던 나는 알리 없었다. 종종 깨지고 험난한 것들을 부수며 터전이라 여겼을 삶이 ‘한 때’가 되는 순간을 나는 역시 알지 못한다.


어느 정도 성장하며 생각하길 아버지가 해고된 건 회사로부터가 아니라 세상으로부터였지 않았나 했다. 세상으로부터 부적격 판정을 받은 셈이라고. 그제야 그때의 무너짐이 이해되었다. 그는 소주를 잔뜩 마시고 뚝배기에 야무지게 눌어붙은 밥알을 종일 긁었다. 부드득부드득 쇠수저로 바닥을 긁는 소리가 얇은 판잣집에 울렸다. 고민이 많았을 테다. 쌀알을 벌어야 할 미래가 척박한 탓에.



새로 온 남자는 친근하고 성실하게 일했다. 숙박객들은 평소와 같이 먹고 마셨다. 바뀐 직원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그녀와 달리 그는 자신의 이름이 선명히 적힌 직원용 명패를 목걸이로 걸고 있었고, 그녀와 달리 문신도 없었다. 수염은 덥수룩하고  머리는 장발에 양쪽으로 빗어 넘겼다. 사실 그런 것쯤이야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나라겠지만 나는 그가 그녀와 다른 점을 찾으며 왜 그녀가 사라져야 했는지 생각했다.


남자는 호스텔의 시설을 도통 익숙해하지 않는 나를 보곤 설명을 듣지 못했냐며 나를 끌고 숙소를 여기저기 걸었다. 난 여태 모르던 위치의 화장실과 풍경을 볼 수 있는 옥상과 자유롭게 마실 수 있는 커피의 위치 등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 남은 나머지 며칠을 조금쯤 더 풍요롭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녀의 그늘진 얼굴, 소홀하던 태도, 나이가 그린 주름이 떠올리기엔 더 좋았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그녀를 생각했고 남자는 마침 세탁기의 이용 요금은 3유로라고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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