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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Oct 25. 2017

근본 없는 코미디

영화 <부라더>


*본문은 주관적인 견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극의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관람하였습니다.



영화를 다 만들어놓고 방심하는 경우가 이런 것일까. 가끔 어떤 작품은 예고편이 스포일러인 경우가 종종 있는데 장르가 코미디라면 더욱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부라더>는 안타깝게도 예고편이 센스 있는 개그의 전부로 쓰였다. 여러 가지 요소를 전부 담으려다 어설픈 시나리오와 없다시피 한 개연성에 지쳐버렸다. 그리고 깨닫는다. 코믹 영화에도 철학적 기반이 있어야 한다는 걸.




안동의 뼈대 있는 가문에서 태어난 형제는 나름대로 번듯한 삶을 산다. 형 석봉은 한국사 강사로, 동생 주봉은 건설 회사에 다니는데 아버지의 부고로 오랜만에 귀향한다. 집으로 가는 길, 오랜만에 마주쳐도 티격태격인 형제는 그 와중에도 다투다 사람을 치고 만다. 그것이 어딘가 이상한 여자 오로라와의 첫 만남. 형제는 어딘가 어설픈 모습이 닮았다. 그리고 물론 외모는 그렇지 않다.




규칙은 며느리에게

종갓집의 가풍은 엄격하여 장례 절차도 복잡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안중에도 없는 형제의 등장에 집안 어른들은 이미 포기한 모습을 보인다. 종손으로서 하는 역할도 없이 제사상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에만 관심 있는 석봉은 숨겨진 보물에 대한 언급을 하는 오로라의 말을 믿고 거창한 장비를 동원해 집 곳곳을 파헤친다. 동생 주봉은 건설 회사로부터 제안받은 사업을 통과시키기 위해 정이 별로 깊지 않은 집안의 어르신들에게 잘 보여 도장을 받아낸다. 분주히 진행되는 장례는 오롯이 집안 여인들의 몫이다.


그런 중요한 집안의 거창한 절차를 고집스럽게 지키려거든 형제에게 왜 모든 모든 책임이 열외 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되려 며느리들의 서열은 빠릿빠릿하게 정립되어 있는데 유교의 모순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그저 풍자가 목적이었더라면 감독은 규율에 반발하는 여인 하나쯤 넣었어야 하는데, 그런 낌새를 띈 집안 막내며느리는 끝까지 담뱃꽁초를 숨기기에 급급하다. 일련의 문제제기가 하나도 없는 것은 해결 의식에 있어 가학적이다.


시대가 어느 땐데 라는 생각이 들만큼, 정통 유교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거북함으로 극을 이끌어간다. 현대 사회에 뿌리내린 옛것을 전통이라 하기에 행실은 고리타분하고 편협하니 그 세상을 존중하기에 더러 힘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초점을 맞춰야 하는 부분을 명확히 알려줌에도 집중할 수 없는 건 그 느낌 때문이다. 그나마 돋보이는 센스 있는 개그코드가 현대적이라 대비된다.




엄마에 대한 집착

이미 몇 번 집안의 가보를 빼돌렸던 석봉은 급기야 동료들까지 불러 본격적으로 집을 살핀다. 주봉 역시 본인의 목적을 위해 개발 동의서를 받는데, 형제는 서로의 낌새를 알고도 그저 헐뜯을 뿐이다. 철없는 형제의 싸움 방식에 초점이 맞춰져 도대체 무얼 하는 건지 맥락이 흐려진다. 둘은 꾸준히 엄마를 기억하는데 인격이 덜 형성된 유아적 모습에 다소 어이가 없지만 그것까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엄마의 젊은 시절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는 건 의아하다. 왜 그렇게 엄마에게 집착하는가.


알고 보니 오로라는 엄마의 분신이었다. 그림자가 없는 귀신으로 나타나 그저 동네의 미친 사람쯤으로 여기던 형제는 충격을 받는다. 본인들이 엄마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에 대하여, 그렇게 부록으로 끼워놓은 감동은 불쾌하다. 마루 밑에서 발견한 엄마의 휴대폰으로 회상하며 그들은 엄마가 종갓집에서 얼마나 시달린 삶을 살았는지 떠올린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중엔 치매에 걸린 엄마를 아버지가 돌보는 장면이 나온다. 무뚝뚝하지만 엄마를 살갑게 챙기던 아빠의 젊은 시절까지 나온다. 형제는 아버지의 사랑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버지를 미워했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살아있을 때 왜 엄마를 병원에 데리고 가지 않았냐며 한 번도 챙기지 않던 그 무심함을 향하던 형제의 분노는 갈 길을 잃었다. 오히려 자신들이 엄마를 속상하게 한 주범이 되었다. 이 어려운 집안의 분위기 속에서 살아남기 어려워 도망쳐야 하기까지 그 누구도 반발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아버지는 사실 집안의 중심을 이루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어쩌다 역할이 그리 되었고 족보의 근본이나 전통의 의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럼 여기서 감독은 스스로 이 모든 장치들을 해체하면서 얻은 게 무엇일까. 그 방향타를 설정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실수가 아니었는가 싶다. 아이처럼 엄마를 찾으면서도 아픈 엄마를 끌고 병원에 데리고 갈 생각이 아예 없던 것인지 이 사소한 논리의 결여는 결국 영화 속 개연성의 부재가 되었다. 치매에 걸린 엄마는 형제를 끔찍이 생각하는 듯 말한다. 보고 싶으면 내려오라고 하자던 남편의 말에 ‘알아서 잘 하겠죠.’ 그렇게 엄마는 귀신이 되어서까지 뭐든지 이해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차에 치이면서까지 말이다.





"그리고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결국 영화는 그저 그런 결말에 도착한다. 집안을 지키기 위해 동의서를 도로 찾아오는 모습. 그 과정에서 되찾는 형재의 우애. 우연히 뒷산에서 발견한 희귀 식물로 인한 성공까지. 급하게 해피엔딩으로 몰아붙이는 속도에 보는 이는 당혹해진다.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찝찝함이 마치 좋은 꿈이었던 것처럼 합리화된다.


물론 이런 류의 영화는 진지하지 말고 가볍게 보자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장르적 특성을 칼자루로 휘두르면 영화는 본질을 잃게 된다. 허구적 판타지일수록 관객을 설득할 장치는 치밀해야 한다. 영화의 카피인 근본 있는 코미디가 무색하게 여러모로 아쉬운 영화였다. 그들의 족보가 사실 근본 없는 것이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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