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빙보이 인 뉴욕>
*본문은 주관적인 견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극의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관람하였습니다.
뉴욕이라는 도시의 감성은 무엇을 해도 받아들여질 것 같은 힘이나 에너지가 있다. 너무 쉽게 가려고 한 걸까. 단순히 뉴욕 하나로 덮기에 너무 많은 것들을 잃은 느낌은. 그냥 덮어놓고 이해하라는 불친절은 감독의 전작이 <500일의 썸머>여서 일지도 모른다. 누누이 말하는 배급사의 횡포가 그렇다. ‘썸머가 떠났다.’는 카피는 그 예감을 확인시켜준다.
주인공 토마스가 조금이라도 엄마를 생각한다면 그러면 안 됐다. 실망스러운 전개에 그런 생각이 불쑥 들어버리고 만 것. 도덕이나 윤리적인 잣대를 제하고도 말이다. 사랑이야기를 할 것인지, 가족 이야기를 할 것인지 마크 웹 감독은 방향을 갈팡질팡하다가 놓쳐버린 게 아닐까. 무게추를 잘못 놓은 감독을 대신해 아마도 원래 의도했을 방향으로 무게를 실어본다.
어중간한 태도를 취하는 미미에게 질려버렸을지도 모른다. 그간의 사정을 대변하듯 토마스는 또다시 선을 긋는 미미에게 화를 낸다. 그런 말은 어장 관리하는 여자나 하는 거라고. 애타는 조급함과 더불어 여성에게 사랑을 얻는 방법을 모르는 토마스의 굽은 어깨가 애달프다.
썩 좋지 않은 하루를 보내고서 '이상한 이웃'과 마주치게 된 토마스는 어쩐지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제랄드가 불쾌하다. 토마스의 인생이 내내 스토리가 없다고 하다 일련의 사건이 벌어지고서 그는 드디어 주인공이 되었다고 말한다. 다분히 수상쩍은 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는 토마스는 어떤 유대를 느낀 것일까.
나랑 자려고 수작 부리지.
좋은 집을 두고 가난한 거리에 자리를 잡아 살고 있는 토마스. 그는 집에 갈 때마다 약쟁이의 소굴이라거나 자신을 조롱하는 친척들이 싫다. 다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호들갑을 떨며 죽고 못 사는 엄마에게만 신경이 쏠려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아버지의 내연녀를 만나고 만다.
여느 날처럼 미미와 데이트를 하다 우연히 마주친 아버지의 외도는 소년에게 버겁다. 해결법도 모른 체 그녀를 미행하다 들켜버리고 마는 토마스는 무덤덤한 내연녀 조한나에게 휘둘린다. 함께 일하다가 토마스의 아버지 에단과 사랑에 빠진 그녀. 그저 헤어지라는 말만 반복하는 토마스를 가볍게 가지고 논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불륜을 막을 변명은 역시나 자신의 엄마였지만, 토마스는 조한나에게 끌린다. 세상을 모른다며 순진하게만 취급당하는 자신이 뭔가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 그리고 쉽게 간파당한 그 마음을 조한나는 주워 챙긴다.
여느 뉴요커들과 다른 모습인 토마스를 바라보던 미미는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그에게 고백한다. 상대를 좋아하던 타이밍이 미묘하게 어긋난 둘. 미미는 빗 속에서 소리친다. 너는 결국 네가 그렇게 싫어하던, 남들과 똑같은 사람이 된 거야. 뉴욕의 영혼 없음을 외쳐오던 토마스에게 멀어져 가는 미미는 어떤 무게였을까. 영화를 보며 개인적으로 가장 아팠던 장면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소년이 순수를 잃은 바로 그 순간.
소년의 사랑은 통속적인 신파로 끝을 맺는다. 에단에게 조한나와 잤다고 말하는 장면은 어찌나 투박한지 에단이 화를 낼 타이밍을 살짝 놓쳐버린다. 모든 게 끝나버린 채 에단이 너를 참 아꼈다는 조한나의 말만 남는데, 토마스는 에단이 모아 둔 스크랩에서 이상한 이웃 제랄드를 발견한다. 아파트에서 사라진 그를 찾아가 자신의 친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느닷없이 꺾인 방향에 관객은 중심을 잡지 못한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토마스의 어머니는 되려 강하다. 짧은 시간 빠진 사랑은 강렬했으니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맴돈다는 결말은 어느 한 지점으로 가닥을 잡아가던 사람들을 배신한다. 그렇게 맥없이 ‘잘 살았다고 합니다’에 도달하여 허무해진다. 어쩌면 뒤죽박죽인 스토리에서 우리는 무엇을 건져낼 수 있는가. 진실한 사랑? 합리적 외도?
글쎄, 등장인물 어느 누구도 소년에게 진실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닐까.
모두가 욕하는 더러운 세상에 소년이 물드는 과정은 유쾌하지 않다. 글을 쓰겠다는 꿈을 지닌 소년이 그대로 남아있어 주길 바라는 것 역시 욕심이겠지만 더러 찌든 때들이 달라붙는 형식을 찾아보고 싶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의 순진한 사랑을 머뭇거리며 되찾는 사람들에게 남아있는 미약한 희망을 보려 집중해야만 했다고.
이런 불완전한 시나리오의 틈을 관객의 불안은 야무지게 파고든다. 기술로 메우려 하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근사한 영상미와 달리, 역시나 아쉬운 건 아쉬운 일이었다. 영화를 제작한 그들의 설명이 부족했던 것처럼 다수의 관객들이 친절히 비밀을 캐내 주리란 생각은 오산이다. 보여주고 싶은 것들을 드러내지 않는 것과 꽁꽁 숨겨버리는 것은 이만큼이나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