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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Dec 20. 2017

죽음 후에 오는 것들

영화 <고스트 스토리>


*본문은 주관적인 견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극의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관람하였습니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예감과 달리 <고스트 스토리>는 윤회 사상과 사념체에 관한 서구적 해석에 가깝다. 시퀀스가 얼마나 독창적이었던지 함께 보던 관객 중 헤아리기로 꼬박 다섯 명이 견디지 못하고 중도 퇴장했으니까. 대사가 거의 없이 길게 이어지는 정적인 씬에서 호흡의 심장소리까지 섬세하게 다루는 영화는 어쩐지 변태적인 면이 있다. 상상으로만 그칠 세계를 온전히 필름에 담아야 하니 시간의 흐름에 대한 표현이 짙을 수밖에 없다. ‘자, 이제 죽음 이후의 이야기를 하자’





주인공의 죽음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주인공 C와 M은 작고 낡은 집에서 오붓하게 산다. 밤중에 들리는 이상한 소리에 잠에서 깨는 소동도 있다. 고스트라는 단어가 있으니 내심 조금쯤 놀라길 기대해본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이 너무나 다정하게 서로를 끌어안고 잠이 드는 둘. 이사를 가고 싶다는 M의 말에 잠시 다투기나 할 뿐 둘에게는 어떤 문제도 없다.


갑작스럽게 죽고 마는 C. 징조 없는 죽음은 현실적이다. 원래 그렇게 오는 것들이 있지 않은가.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M은 영안실에서 시신을 홀로 지켜보다 돌아 나간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텅 빈 공간을 잡는 카메라에게서 받는 압박은 끔찍한 경험이다. 영안실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 무서워질 무렵 그는 고개를 든다. ‘고스트’가 된 C가 나타났다.



구멍 난 고스트

전체적으로 우스꽝스러운 그림이다. 병원 시트를 뒤집어쓰고 뭐하는 짓인가 싶은 생각을 괘념치 않고 걸어가는 고스트는 병원을 빠져나오다 환히 빛나는 벽을 마주한다. 어느 누가 보아도 승천할 수 있는 문이 아닌가. 그러나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듯 걸음을 돌리는 그가 집으로 간다. 걷는 것인지 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집으로 향하는 그에게 남은 미련은 무엇일까.


사랑하는 사람 곁을 순식간에 떠나게 되었으니 그 마음이야 모를 리 없다. 그렇지만 대개 저승을 관장하는 무엇이 있어 잡으러 온다거나, 이승을 떠도는 것은 악령이 된다거나 하는 보편적 상상과 달리 아무 일도 없다. 말도 하지 못하고 전할 방법도 없으니 그저 가만히 있을 뿐. 그는 그렇게 애인 M곁에 있다.



애플파이

M은 이웃이 놓고 간 애플파이를 먹는다. 이 장면에 할애된 시간은 말도 안 되게 길다. 정말 애플파이 하나를 다 먹을 때까지 녹화는 멈추질 않는다. 이 길쭉하고 의미 없어 보이는 장면에서 그 지루하게 느끼는 시간조차 넘어 그녀에게로 감정이 흡수되고 마는 것이다. 섬세하게 진행되는 먹방은 온 감각을 동원해 집중해야 한다.


포크만 들고 조금 퍼 먹는 M. 썰어먹지 않아도 된다.

그녀는 이제 혼자니까.

접시 째 들고 바닥에 앉는 그녀. 편하게 먹어도 된다.

그녀는 이제 혼자니까.

감정이 복받쳐 잠시 울다. 포크에 힘을 실어 먹는다.

그녀는 이제 혼자니까.

기계처럼 움직이는 손과 입.

꾸역꾸역 비워지는 애플파이는 삼켜져 비로소 끝난다.


아, 양푼에 밥을 비벼 삼키는 새벽과 닮지 않았나.



건넛집에도 누가 있긴 있다. 그 유령 역시 공간에 머물고 있긴 하지만, 무얼 하는지 누굴 기다리는지 잊은 듯 그렇게 있다. M은 새로운 사랑을 만나기도 하고 C의 짐을 정리하고는 집을 떠난다. 새로운 가족이 들어오고 단란하게 만들어가는 삶에 분노한 C가 그릇을 죄다 집어던진다. 어쩌겠는가. 산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그렇게 기괴한 일을 겪고 흉가로 자리매김한 그의 집.


M이 떠나기 전, 벽 사이에 끼워 둔 쪽지를 보기 위해 긁고 또 긁으며 남아있다. 재개발을 위해 건물이 무너지고 새로 빌딩이 들어서고, 다시 그 공간의 과거와 흐르는 시간 속에 유예된 유령 C는 다시 자신과 M이 살던 시간의 조각을 보게 된다. 유령이 된 자신이 피아노에 걸터앉아 생긴 소리에 달려 나오는 C와 M. 살아있는 그들은 코 앞에서 자신을 보지 못한다. 허망함이 가득하다.


집이 무너지기 전의 시간으로 돌아와 쪽지를 꺼내 든 유령은 그것을 읽고 소멸하고 만다.





구체적인 설명 하나 없이 진행되는 영화에도 마법처럼 빨려 들어갈 수 있는 힘은 아마도 직관적인 표현 때문일 것이다. 초반 이후 대사라고는 찾기 힘들고 유령은 정말 소리 하나가 없는데, 이런 가상화 되지 않은 개체의 속성이 되려 현실성을 갖는다. 그렇기에 여태까지 세상에 등장했던, 사후 세계나 유령에 대한 상상을 타파할 설득력이 있다. 조금 서늘할 뿐 공포가 없는 죽음의 세계는 이렇지 않을까.


주인공은 죽고 난 뒤 벽을 뚫고 사람의 몸을 통과하여 자신이 죽었음을 자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아는 듯 부드럽게 사이를 빠져나가고 예의 있게(?) EXIT라 적힌 출구를 이용하는 등 대단한 능력이 생기지는 않는다. 집 주변의 작은 마을이 개발로 무너질 때 사라진 이웃 유령과 달리 C가 시간여행을 한 번 더 하고 나서야 소멸할 수 있던 건 죽음에 대한 납득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라 짐작할 수 있다. M이 남긴 쪽지는 유추하건대 이별의 문장이며 그로 인한 목적의 상실이 준 소멸.


산 자와 죽은 자가 세상을 달리 하는 것에 대하여 영화는 명확히 구분 짓고 있다. 어떻게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생사에 대해 씁쓸한 여운이 남는 일 역시 영화의 목적이겠지만 죽음을 무서운 일이라 단정 짓지 않는 태도는 명랑하지 않은가. 구멍 난 시트의 귀여움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그리고 물론 영화를 본 이후의 행복한 상상은 덤이다. 지금 당신 곁에도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가 아직 이별하지 못해 남아 머물고 있다면, 무섭진 않을 것이다. 알지 못하는 것들에게 품은 막연한 공포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게 해 준 이 영화는 그 느낌 자체로서 충분한 경험적 성취가 되었다.


그래, 어쩌면 유령이라는 건 남은 감정의 부유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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