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빛나는 가을.
계절을 구분 짓는 이상한 기준이 있어. 붕어빵 아저씨가 낮부터 장사를 시작할 때. 이건 겨울. 사람이 많은 곳엔 가끔 예외도 있지만, 작은 골목. 사람이 많지 않아 종종 지나다 멈춰 서는 작은 노점이 낮부터 열려있다면 그건 겨울. 아, 한 가지 더 있다. 우체부 아저씨의 오토바이 털장갑. 추위를 부쩍 타는 아저씨라면 조금 이르게 털장갑을 달겠지만 그건 역시 겨울. 비록 봄과 가을이 너무나 짧아져서 더 이상 사계절이 뚜렷하다거나 계절을 힘껏 누릴 기분은 나지 않아도. 가을 붕어빵 정도는 즐겨.
가을이 좋다고 한들, 오는 겨울을 날렵하게 피할 자신은 없지만 이 미적지근한 계절이 주는 것들이 대부분 스트레스란다. 한 스푼 더 센티멘털해진 친구들을 보며 부끄러워해야 하고, 낮엔 덥고 밤엔 추우니. 입을 옷도 당최 감이 잡히질 않아. 카디건과 트렌치코트. 모든 사람을 참 뻔하게 만드는 모양새가.
어떤 나라는 내내 여름인 나라도 있고, 또 어떤 나라는 내내 겨울인 나라도 있는데. 계절을 더 챙겨야 한다는 것이 불공평하게 느껴진 적도 더러 있어. 몸이 한쪽으로 열심히 적응하면 될 텐데 적응할 만하면 변덕스러운 온도를 견뎌내야 하는 것. 하지만 그래서 어디든 버틸 수 있는 몸이 만들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천고마비라고 하지.
하늘이 높아 말이 살찐다는데, 말만 찌면 될 살이 왜 나한테 오는 걸까. 역시 말띠가 맞긴 맞나. 살이 쪄서 돌아다니기 힘들겠구나. 그렇지만 역시 난 가을이 좋아. 내가 좋아하는 가을방학은 앨범을 내고, 이 때쯤이면 '가을이 왔구나'하며 무더운 여름을 얼른 놓아버리고 싶어서.
너와 나는 걸으며 이야기를 했어. 마음에 안 드는 누군가를 험담하기도 했고, 불평을 잔뜩 늘어놓기도 했는데. 그래, 정작 그 사람 앞에서 했어야 했던 말 따위들. 열심히 하다 보니 그것도 일이라고 몸에서 후끈후끈 열이 난다고. 둘이 얼굴을 마주 보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했던 것 같아. "덥다." 꽤 쌀쌀한 가을밤. 가을밤이어서 가능한 일.
또 계절은 조용히 바뀌어. 아직 계절 모르고 살아있는 모기를 볼 때면, 그리고 모기향을 사야 하는 일이 어색해질 때면. 이제 계절은 또 바뀌었구나. 이 때쯤 일어난 서러웠던 일이 기억나더라도 울 수 있는 분위기가 잘 조성되어있지. 차라리 우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것도. 바람이 차가우니까 몸을 데우는데 뜨거운 눈물 조금 쏟아도 상관없다는 듯이.
꼭 영화에서 보면 낙엽이 질 때쯤 고백을 했다가 아련하게 헤어지곤 해. 어쩜 가을의 고백은 이미 이별플래그가 세워지는 표본 같은 것이어도, 무언가에 홀린 듯 앞다투어 고백을 하지. 가을이 지나면 차가운 겨울이 와, 세상이 끝나게 되는 것처럼. 시간의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우린 결국 사랑을 말해.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그 단어가 사실 전부인 걸 깨닫게 만드는 그 순간의 계절.
다시 뻔한 계절을 준비해. 누군가와 따로 또 같이. 벌써부터 봄을 기다리는 일이야 쉬이 되지 않아도, 겨울을 견뎌낼 자신도 많지 않으니 꼭 뭉쳐 있자. 처음 만난 사람이 두터운 패딩을 입고 있으면 끌어안고 싶어져, 옷 때문에 전달되지 않을 것 같은데도. 꼭 끌어안아보면 그 위로 신기하게 체온이 달려가더라. 낯선 계절에 혼자 추워지다가 문득 꽃이 피면 눈이 부실 것 같아.
이제 아득한 낙엽이 진다.
아, 여태 나는 나 홀로 짙어지려 했던 것 같아.